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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의학자 허준

by 유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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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의학자 중에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이를 꼽으라면 단연코 구암 허준(1539~1615)이다. 한의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전세계적으로 <동의보감>을 필독서로 삼아 옆에 두고 공부를 하며 허준을 접한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한 <동의보감>의 저자로 허준을 기억한다. 무엇보다도 2000년 MBC에서 방영되었던 <허준>이라는 드라마가 한국을 넘어 세계적 열풍을 일으키며 허준은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허준의 삶에 대한 기록이 구체적으로 남아있지 않고, 드라마라는 것이 창작물이다보니 허준에 대한 오해도 많이 생겼다. 비단 오늘날의 일만은 아니다. 허준이란 인물이 조선 후기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기에 사실과 다른 설화가 많이 내려온다. 그중의 몇 가지만 살펴봐도 허준이 하늘로부터 선택받았거나 인간을 넘어 숭상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가난했던 허준이 약방을 운영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한 노인이 약방에 찾아와 진료도 없이 산모와 아이에게 곽향정기산(실제로 토사·복통·어지러움에 효과가 있다.) 세 첩을 허준의 반대에도 처방해주었다. 곽향정기산을 먹은 모든 이들의 병이 낫게 되자 허준은 비법을 물었다. 노인은 산인(山人,도인)에게서 배웠다며 여섯가지 재주와 의학서적의 내용을 허준에게 들려주었다. 이후 노인이 가르침에 힘입어 허준은 명의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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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황제가 병이 들었으나 아무도 고치지 못하자, 허준에게 도움을 요청해왔다. 허준이 황제를 치료하기 위해 중국으로 가던 중 호랑이를 치료해주었고, 호랑이는 치료받은 댓가로 침과 회혼포 주었다. 먼 길을 걸어 베이징에 도착했지만, 허준은 중국 황제의 병을 고칠수가 없었다. 난감한 상황에 있던 허준은 마지막 방편으로 호랑이가 준 선물을 이용하여 황제를 치료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믿지 못할 설화가 전해오는 것은 당시 변변치 않은 약도 먹지 못했던 민초들에게 허준이라는 이름 그 자체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허준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했고, 학문을 익힐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져 있었다. 아버지인 허론은 용천부사를 지낸 관료였으며, 어머니 또한 양반가문의 서녀로 시집을 왔다. 어머니가 정실은 아니었지만, 다른 서자들하고는 달리 허준은 골고루 학문을 익혔다. 기록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경학과 역사에 널리 밝았으며, 특별히 의학에 정진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허준이 의학을 선택한 것은 중인으로서 문과를 볼 수 없는 현실이 가장 컸다. 하지만 의과에 응시하지 않고 젊은 시절 전라도와 경기도 파주 그리고 서울을 오가며 의술활동을 펼쳤다. 의술이 뛰어나 이름을 떨쳤지만, 무엇보다도 정승을 지냈던 유희춘(1513~1577)의 얼굴에 난 종기를 치료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유희준은 1569년 이조판서 홍담에게 허준의 천거를 부탁했고, 30세에 내의원이 된다. 빠른 나이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정계에 있던 관료들과의 친분과 명성 덕분에 종4품이 제수되었다. 이는 일반적으로 의과에서 초시와 복시 1등을 했을 때 종8품을 받는 것에 비해 굉장히 빠른 승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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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집안과 친분만으로 높은 벼슬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뒷받침되는 실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허준은 1581년 왕명에 의해 의학서 <맥경>과 <찬도방론맥결집성>을 직접 교정하고 집필하였다. 무엇보다도 광해군이 천연두로 죽을 위기에 처하자 모든 의원이 치료하기를 꺼려했다. 이때 허준이 광해군을 살리면서 선조로부터 정3품 당상관을 받았다. 이는 당시 중인이자 의관이 받을 수 없는 당상관이어서 반대가 심했지만, 선조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허준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많은 이들의 부름이 이어졌지만, 다리 병을 칭하며 응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백사 이항복은 임진왜란 당시 몽진길에서 허준에게 “허준의 다리 병에는 난리탕이 신기한 효험이 있구만.”이라고 말을 건넬 정도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허준을 게으르고 거만하다 기록했지만, 그대로 믿을수는 없다. 박준이 아버지의 중풍을 고치기 위해 매일 새벽 허준의 집을 찾아와 부탁하자 들어주었다는 이야기 등 허준이 여러 효자들의 부탁은 들어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아마도 허준 스스로 구설수나 붕당간의 정쟁에서 화를 부를 수 있는 일을 경계했을 수도 있다.

허준에게 있어 힘든 시기였지만, <동의보감>이라는 큰 업적을 남기게 된 사건은 임진왜란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피난길에 올랐을 때, 허준은 그 뒤를 묵묵히 따라갔다. 온갖 어려움이 가득한 길이었지만, 허준은 자신이 해야할 일에 최선을 다했다. 특히 1596년은 허준 개인을 넘어 우리의 역사에 있어 중요한 해였다. 허준이 왕세자의 병을 고치고 동반(문관)에 오르며 중인의 신분을 벗었고, 선조의 명에 의해 <동의보감>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왕이 제공해주는 수백 권의 책과 허준 자신의 경험이 밑바탕이 되어 진행된 국가 사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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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학의 모든 책을 섭렵하여 검증된 것을 선정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었다. 풍부한 의학지식이 바탕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책 집필에만 매달려도 힘든 일인데, 주변 환경이 허준을 도와주지 않았다. 정유재란으로 지원이 끊겼고, 같이 활동하던 의원들도 떠났다. 허준만이 홀로 집필을 이어나갔다. 1608년에는 선조가 죽은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의주로 유배로 떠나며 동의보감은 완성을 보지 못할 뻔했다. 그러나 광해군이 허준을 서울로 불러들여 <동의보감>의 완성을 부탁한 결과, 1610년에 완성될 수 있었다.

허준은 <동의보감>을 집필하면서도 백성들이 한글로 의학서적을 읽고 활용할 수 있도록 번역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책이 <언해태산집요>, <언해구급방>, <언해두창집요>다. <동의보감>이 완성된 다음에도 급성 전염병의 대책을 적어놓은 <신찬벽온방>, 동아시아 최초로 성홍열을 다룬 <벽역신방>을 저술했다.

허준이 생을 마감한 강서구는 2005년 허준박물관을 개관했다. 허준 박물관에는 허준의 생애와 <동의보감>에 관련된 내용이 충실하게 갖추어져 방문하는 많은 이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인근 초·중·고의 학생들도 이곳을 방문하여 여러 체험을 하면서 허준박물관은 강서구를 대표하는 장소가 되었다. 허준박물관을 관람하고 나오면 멀지않은 곳에 허준이 <동의보감>을 저술했다는 허가바위를 방문해야 한다. 허가바위는 양천 허씨의 시조인 허선문이 태어났다는 전설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 병자호란, 6·25전쟁 때 이곳에 사람들이 피난했다는 점에서 백성을 위한 <동의보감>을 저술한 허준이 떠오른다. 허가바위는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서울에서 이런 자연환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허가바위 옆으로는 구암공원이 있는데 원래 이곳은 한강이 흐르던 곳으로 멋진 절경을 가지고 있었다. 올림픽대로가 만들어지면서 그 자리에는 아파트와 공원이 들어서게 되었다. 과거 한강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구암공원 호수 한가운데 있는 광주바위다. 경기도 광주에서 흘러왔다는 광주바위가 있는 호수 앞에서 병자를 간호하는 허준의 동상은 오랫동안 우리의 눈길을 머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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