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대의 조선은 혼돈의 시기였다. 흥선대원군의 섭정이 끝나고 고종이 직접 정치의 일선에 나서면서 국가의 대외정책이 크게 바뀌었다. 흥선대원군 시절의 쇄국정책이 막을 내리고, 고종은 개화 정책을 폈다. 그러나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외척이던 민씨 세력에 의해 이루어진 개화 정책은 부와 권력을 가진 양반계층보다는 일반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다.
가장 대표적이며 널리 알려진 개화 정책의 산물이 별기군이었다. 양반 자제들로 이루어진 별기군은 서양 무기로 무장을 하며, 강력한 조선으로 나가는 초석이 될 것이란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선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군대였을 뿐이다. 일본 상인들에 의해 시장이 잠식당하며 삶이 어려워진 백성들에게 별기군은 외세에 끌려다니는 조선의 모습이었다.
더욱이 국가 재정이 열악한 상황에서 별기군을 운영하기 위해 구식 군대의 월급을 주지 않자, 군 내부의 반발은 매우 켜졌다. 이런 가운데 1882년 13개월 치 밀린 급료를 주는 과정에서 관리들이 쌀을 빼돌리면서, 구식 군인들에게 겨와 모래가 섞인 쌀이 지급되었다. 이를 계기로 구식 군인들이 주도된 폭동이 일어났다. 여기에 개항 이후 더욱 살기 어려워진 백성들이 동참하면서 반정부·반외세 운동인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구식 군인들은 일본과 서구에 대해 강경하게 맞섰던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조선을 바로 잡아주기를 요청하고, 개항에 앞장섰던 개화파와 민씨 세력을 처단했다. 나아가 별기군의 일본인 교관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했다. 이 와중에 민비는 살기 위해 충주 장호원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정권을 되찾기 위해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했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절대 해서는 안 될 외세를 끌어들였다.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약해지던 청의 입장에선 매우 반가운 일이었다. 청은 수사제독 오장경에게 3천 병력을 주어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때 오장경 휘하에는 23살의 위안스카이가 있었다. 위안스카이는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여 청으로 끌고 가 연금시키고 임오군란에 동참했던 우리의 군인들을 학살했다.
위안스카이는 이후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도 진압하며, 자신의 이름을 청에 널리 알렸다. 그 이후 조선에서 황제와 같이 굴며 내정간섭을 했다. 고종을 알현하기 위해 궁궐에 들어올 때도 가마를 타고 들어와, 조선의 실질적 지배자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위안스카이에 의해 두 번이나 정권을 지켰던 고종과 민씨 세력은 이를 제지하기는커녕 눈치만 보았다.
위안스카이는 조선의 여인 3명을 첩으로 삼으며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해나갔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위안스카이가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라는 직책으로 청황제를 대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위안스카이는 조선이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끌어오려고 했을 때도 간섭했으며, 청나라 상인들이 조선에서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였다. 그 결과 서울의 남대문과 종로에는 중국인 거리가 생겼고, 조선인들은 상권을 청나라 상인에게 빼앗겼다.
시세의 흐름을 잘 읽었던 위안스카이는 청·일 전쟁이 일어나기 전 청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서태후의 신임을 얻어 군대와 권력을 키워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퇴위시키고 대황제에 올랐다. 비록 국내외의 큰 반발로 병을 얻어 얼마 뒤 죽었지만 말이다.
만약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지 못하다면 우리 조선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청이 이기고 조선을 자신의 나라인 것처럼 여기던 위안스카이가 계속 살아있었다면 말이다. 생각하기도 싫은 역사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 글은 청과 일본 중에 누가 더 나으냐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에 급급하여 외세를 끌어들여 자신의 백성을 죽인 위정자를 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늘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고 말하던 위정자들의 본모습은 위기가 닥치면 드러난다. 그리고 거짓으로 백성을 현혹하며 자신의 권력을 움켜쥐려 한 위정자들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이 백성이란 사실도 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