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가 3~6세기 중국 요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의 사실 여부를 두고 오랜 시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현실적으로 백제의 국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입장과 중국과 우리의 사서에 나와 있는 만큼 진실이라는 입장 중 무엇이 옳을까?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도 어느 정부, 출판사냐에 따라 다르게 서술되었다. 개인적으로도 수업할 때 교과서에 ‘백제 근초고왕 때 중국의 요서, 산둥, 그리고 일본의 규슈까지 백제의 영역이었다.’라는 부분을 읽으면 신이 났다. 반면, ‘진출하였다.’ 또는 생략된 경우 아쉬움과 속상함이 컸다. 그러면서도 교과서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집필진의 고민이 매우 컸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백제의 요서 진출의 부정하는 근거는 주로 일본학자가 강하게 주장했다. 우선 백제가 중국으로 진출할 국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이야기한다. 백제의 전성기를 이끌던 근초고왕 때 마한을 정복하며 한반도 서남부를 장악했던 사실을 내세우며, 중국에 영토를 확보할 국력이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두 번째로 당시의 항해술로는 대규모의 선박을 고구려의 연안을 거치지 않고 보내기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세 번째로 고구려에 한성을 빼앗기며 존망의 기로를 겪던 상황에서 490년 북위의 수십만 대군을 물리쳤다는 상황이 납득할 수 없다고 말한다. 네 번째로 북중국 왕조의 역사서에 백제의 요서 진출 기록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반면 백제의 요서 진출을 인정하는 측에서는 중국의 역사서와 삼국사기를 근거로 제시한다. <송서>에 ‘고구려가 요동을 정벌하자, 백제는 요서를 공격해 차지했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다.’ <양서>는 ‘진나라 때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공략해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진평 2군을 빼앗아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 <남제서>에 ‘북위 오랑캐가 기병 수십만을 동원해 백제를 공격하여 그 지경에 들어가니, 모대(동성왕)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북위 군을 기습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이외에도 중국 사서에 요서가 백제의 영토였음을 밝혀주는 많은 자료가 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서도 ‘위나라에서 병사를 보내어 침범해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고제의 후주가 위덕왕에게 사지절도독 동청주제군사 동청주자사의 직함을 주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위 자료를 종합해봤을 때, 첫째 북위와 백제의 국경이 맞닿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백제왕을 중국 지명의 책임자로 거론한 것도 중요한 증거가 된다. 무엇보다 당시 중국이 5호 16국을 거처 남북국시대로 매우 혼란했던 시대였다는 점이 백제의 요서 진출을 보여주는 세 번째 근거가 된다. 이 당시 국가의 조직을 갖추지 못한 민족도 중국을 침략하여 국가를 세웠다. 그런데 수백 년간 국가를 운영해오던 백제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역사를 축소하고 왜곡시킨다고 말한다.
네 번째로 중국과 일본에 대규모 선박을 보내며 교류하던 백제의 항해술과 조선술을 감안했을 때 요서로 군대 이동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고조선의 영역이 만주와 한반도에 국한하지 말자고 주장한다. 요서 지역에 고조선 유민과 고구려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존재했다면 언어와 문화적 동질감을 바탕으로 요서 지역을 충분히 수 세기 동안 장악할 수 있었다고 본다.
분명 백제의 요서 진출은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분야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리고 진실이 꼭 밝혀져야 할 역사다. 백제의 요서 진출은 우리 민족이 한반도에 갇혀있다는 반도 사관에서 벗어날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 요서 지역이 백제의 영토였다는 사실이 진실로 밝혀진다면 우리의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일제가 심어놓은 식민사학은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한국 사람으로서 백제의 요서 진출 사실 여부를 우리 입장에서 풀어줄 사람이 나오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