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근현대사에서 그를 빼놓고 설명할 수 있는 사건이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만큼 논란의 중심에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이승만의 행동과 업적을 평가하는 것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매우 어려워한다.
광복 무렵 이승만은 1940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에서 일본의 미국 침략을 예견하면서, 이승만의 이름은 더욱 높아졌다. 특히 국민들에게 독립운동가로서 이승만의 이름 석 자는 더욱 깊이 각인되었다.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모두 독립 이후 구성할 정부의 각료로 이승만을 선정한 데는 그만큼 이승만의 명성이 높았음을 보여준다. 1945년 공산주의자들이 이승만을 조선인민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하려 한 것도 하나의 예이다.
하지만 이승만이 광복 이후 국내로 돌아오기는 쉽지 않았다. 가장 큰 원인은 미국이 한국인에게 자치능력이 없다고 판단하면서, 한국의 어떤 정부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방침 때문이었다. 이러할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각료로서 대한 임정의 승인과 무기 원조를 요청한 이승만을 미 정부가 좋아할 리가 없었다. 미 국무부는 이승만의 귀국을 거절하다가, 미 군정 최고 책임자였던 하지(John Reed Hodge) 중장의 요청에 개인 자격으로 한국에 입국하는 것을 허용했다. 1945년 10월 16일 드디어 이승만은 한국에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승만이 한국에 도착할 무렵은 국내외적으로 혼돈의 시기였다. 미국, 영국, 소련은 1945년 12월 대한민국의 신탁통치안을 발표했다. 이 소식에 모든 한국인이 신탁에 반대했다. 하지만 소련의 지시를 받은 공산주의자들이 찬탁으로 돌아서면서 국내는 분열과 반목이 극대화되었다. 이승만을 비롯한 많은 민족지도자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가운데 미소 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에 대한 이견으로 아무 성과 없이 끝났다.
미 군정은 신탁통치에 강하게 반대하던 이승만과 김구 등 민족 세력을 배제하기 위해 중도성향의 여운형과 김규식이 주도하던 좌우합작 운동을 지지하였다. 이들은 1946년 좌우합작위원회를 발족하고 과도입법의원을 출범하였으나, 대중의 지지를 크게 얻지 못하였다. 반면 이승만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조직하여 반탁운동을 벌이며 자신의 세력을 넓혀갔다. 특히 1946년 6월 정읍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라도 해야 한다는 연설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해 12월 이승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신탁통치 포기와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하지 중장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했다. 당시 미국은 이승만을 자국의 정책에 방해되는 인물로 인식하고, 일체의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미국이 1947년 한반도에 대한 정책을 바꾸었다. 신탁통치 논의 과정에서 한국인의 반발과 소련과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남한에서 미군 철수를 주장하던 미 육군부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이후 미국은 유엔을 통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였다. 여기에는 중국에서의 국공합작의 실패와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으려는 마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전략적 가치가 적은 한국을 포기하려는 배경이 있었다. 하지 중장도 유엔에서 한국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적극 추진해야 함을 미국에 건의한 것도 한몫했다.
이승만은 미국의 입장 변화를 환영하며 1948년 이루어진 제헌국회 선거에서 동대문구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했다. 그리고 초대 국회의장을 거쳐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이승만은 민족 분열을 심화시키고, 분단하는데 앞장섰던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물론 유엔 한국 임시위원회에서 호주, 프랑스 등 일부 국가들이 남한의 우익지도자도 단독선거에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면 반대했을 때, 김구와 김규식을 중국영사관으로 불러 식사를 하며 단합한 모습처럼 보여주는 정치적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남과 북 각각 정부가 수립한 것이 이승만의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1993년 공개된 스탈린의 지령에서 당시 소련 군정이 이미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에 방향을 잡고 깊이 개입했음이 밝혀졌다. 미국도 냉전 체제하에서 급변하는 정세에 맞추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요청에 공감하고 따른 것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승만이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인물인 것은 틀림없다. 시국의 변화를 잘 감지하고 이용할 줄 알았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모습도 보이면서 많은 지지를 끌어내기도 했다. 천관우 선생의 말로 이승만의 평가는 각자에게 맡겨보지만, 참으로 어려운 문제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인물이 많지 않은 형편에서, 어떤 인물에 대한 극단적인 평가는 피했으면 좋겠어요. 한 인물에 대해서 조그만 흠이라도 찾아서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기로 말하면, 성하게 남아날 사람이 우리 역사상에 몇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되도록이면 좋은 점을 발견하는 아량과 관용으로,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총결산해서 플러스 편이 크면 우선 긍정적으로 평가해놓고, 그 테두리 안에서 흠을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참고
대한민국 정부수립과정에서 이승만의 역할에 대한 재평가, 2011 김용호, 한국정치연구
이승만과 미국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수립무료, 2009 차상철, 미국사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