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 운동은 분명 국가에 의해 자행된 시민학살이었음에도 아직까지 북한군의 소행이라 주장하거나, 이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 며칠 전에는 북한특수군 김명국(본명 정명운)이 5‧18 때 광주에 간 적이 없다고 밝혔다. 당시 조장에게 들은 이야기에 자신이 살을 붙였다고 증언하면서, 최근에도 일부 의원이 공청회에서 증언해달라는 요청한다고 말했다.
80년대를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는 분들을 만나 5‧18 민주화 운동 관련 이야기를 들어보면, 오히려 지금보다 진실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광주에 살지 않은 분들은 5‧18 민주화 운동에 관한 소식을 접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분이 많았다. 광주에 살던 분들도 집 밖에 나가지 못하고, “누가 죽었다. 핏물이 흘러내렸다.” 등 소식을 건너 들었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았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광주에 살던 분들은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 알고 있었고, 외부 지역에 사는 분들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영화 <택시 운전사>에서도 나왔듯이 광주 인근의 담양이나 화순 사람들조차 광주의 상황을 알지 못했다는 점에서 당시 신군부가 언론을 얼마나 잘 통제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최근 KBS에서 “오월의 청춘”이라는 드라마에서 5‧18 민주화 운동을 다루고 있다. 드라마 초반 젊은 청춘들의 예쁜 사랑과 밝은 모습에 많이 웃고 있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어떤 아픔과 시련이 다가올지를 아니 가슴이 먹먹해지고 아파져 온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기본적인 개념이 일상생활에서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지금, 과거에 민주주의를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과 고통이 있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하거나 접해보지 못한 사람이 많다.
민주화 운동의 하나였던 5‧18 민주화 운동은 1980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벌써 40년이나 지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의 많은 분은 5‧18 민주화 운동을 기억하며, 많은 사람에게 알리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광주를 자주 방문한 것은 아니지만, 5‧18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장소를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다. 현장에 계신 분들이 먼저 다가와 민주화를 위한 노력과 희생을 전달해주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2021년 5월 14일 “5‧18정신 계승 민족 민주열사 유영봉안소”를 방문했을 때 안내하는 분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우리 일행에게 말을 걸고 싶어 하는데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는 모습이 느껴졌다. 그래서 먼저 이곳이 국립 5·18민주묘지 내에 있는 유영봉안소와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분의 표정이 밝아지면서 정말 많은 것을 알려주고자 열강하는 모습에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물론 알지 못했던 많은 부분을 알게 되면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그분에게서 의문이 들었다. 1980년 아무리 나이를 많이 쳐도 10살 아래의 어린 나이였을 텐데, 무엇이 지금 이 자리에서 저분이 열강하게 만들었을까? 비단 이분만이 아니라 많은 광주 사람들에게 5‧18 민주화 운동을 자랑스럽게 만들었을까?
2020년 5월 전일빌딩 245는 헬기 사격의 탄흔을 통해 계엄군의 학살을 똑똑하게 기억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이 외에도 금남로 주변을 비롯하여 광주 곳곳에 5‧18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많은 건물이 보존되고, 기념관이 만들어져 운영되고 있다. 광주 시내 중심에 있어 상당히 비싼 임대료를 얻을 수 있는 이점을 버리고, 역사를 기억하는 공간으로 만들어 보존하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전일빌딩 245를 해설해주신 분은 5‧18 민주화 운동의 마지막 날 전남도청을 지키려 했던 여성분이었다. 헬기에서 발포한 총탄이 지금도 남아있는 전일빌딩도 인상 깊었지만, 그분의 설명에 가슴이 아파졌다.
“마지막 날 도청에서 함께 하고자 했지만, 총을 쏘는 방법을 모르는 여성들은 모두 나가라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여성들과 나왔다. 전남도청 밖으로 나오자 거리에 쓰러져있는 시민들의 시신이 너무도 무서웠다. 집으로 가는 도중 계엄군의 진입에 교회로 숨었다. 우리를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도와주러 나왔던 청년들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했으나, 자신들이 맡은 바 임무를 완수했다는 보고를 해야 한다며 그들은 떠났다. 그리고 그 청년들이 모두 죽었다. 우리는 다음날 새벽 가지고 있던 소지품을 모두 교회에 두고 밖으로 나왔다. 계엄군의 검문을 받았지만, 간호사라는 거짓말로 위기를 벗어나 집으로 달려갔다. 밤을 지새웠던 어머니는 맨발로 나오시면 나를 끌어안았다. 지금도 전남도청에 남아있던 분들과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기 위해 나온 청년들이 기억난다. 나는 그 당시를 이렇게 전달하고 알리는 것이 살아남은 이유고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
미얀마에서는 우리에게 너무도 당연한 자유와 평등을 되찾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목숨을 걸고 투쟁하고 있다. 그리고 5‧18 민주화 운동의 성공을 선례로 삼아 자신들도 이루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과 일본보다 대한민국의 도움을 더 절실하게 바라며 감사하고 있다. 미얀마뿐만 아니라 아직 민주주의를 이루지 못한 나라들은 대한민국을 모델로 삼는다. 그런데도 5‧18 민주화 운동을 북한의 소행이라는 거짓으로 치부하는 사람들로 인해 대한민국의 격이 낮아지고 있다.
그리고 아직 우리에겐 해야 할 일이 있다. 현재와 미래의 후손, 그리고 민주주의를 바라는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5‧18 민주화 운동의 성공을 알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시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야 한다. 그래야 5‧18 민주화 운동은 끝이 난다.
지금도 광주가 5‧18 민주화 운동을 기억하고 알리고자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직도 과거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최소한 “5‧18 민주화 운동이 북한군의 소행이다.”, “5·18 유공자가 과도한 특혜를 받고 있다.”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대한민국의 격을 낮추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