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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Jun 01. 2021

나라를 위한 마음은 같았다.



김상헌은 청의 군대를 피해 모두가 도망치기 바쁠 때, 66세의 나이로 60리 눈길을 걸어 남한산성에 들어왔다. 성리학의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청나라와 싸우자는 주전파를 대표하는 김상헌은 매우 강직한 인물이었다. 반면 김상헌보다 16살 적은 최명길은 청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파의 대표 인물이었다. 최명길은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 있도록 시간을 마련하는 등 현실적인 관점에서 병자호란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청 태종에게 항복을 권하는 문서가 도착하자, 김상헌은 청 태종이 보낸 문서를 군사들에게 보여주어 사기를 높이는 데 사용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최명길은 청 태종이 직접 조선에 온 것은 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함이니 끝까지 싸우기보다는 화의를 맺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다. 주전파와 주화파가 서로 옳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전투는 연신 패배하고 군량은 바닥을 보였다. 무엇보다 외부에서 원군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인조는 항복을 결정했다.



인조가 항복하겠다고 발표하자, 김상헌은 자살을 시도하며 강하게 거부했다. 그럼에도 인조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자, 항복하러 가는 왕의 행렬을 따르지 않고 안동으로 낙향했다. 청나라 군대가 물러나고 인조를 호종한 관료들에게 상을 내릴 때도, 김상헌은 상을 거부하고 오히려 청에 대한 복수를 당부하였다. 청나라는 정축화약을 인정하지 않고 복수를 외치는 김상헌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1640년(인조 18년) 심양으로 압송하였다.
 
반면 최명길은 항복문서를 작성했다는 오명이 두려워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항복문서를 작성했다. 그로 인해 최명길은 많은 관료들의 질타를 받았다. 그러나 최명길은 개인의 입신양명을 위해 화친을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당장의 위급함을 벗어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뿐이었다. 최명길은 청나라 군대가 물러난 후 명나라 황제에게 정축화약이 어쩔 수 없는 이루어진 상황이었음을 알리는 문서를 보냈다. 이 일로 최명길도 1642년(인조 20년) 청나라 심양으로 압송되었다. 같은 감옥에 갇힌 김상헌과 최명길은 벽을 두고 나라를 위하는 방법이 서로 달랐을 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같다는 것을 인식하며 시를 나누었다.
 
 



김상헌                                       최명길


양대의 우정을 찾고                                           그대 마음 돌 같아서 끝내 돌리기 어렵고
(從尋兩世好)                                                           (君心如石終難轉)
백 년의 의심을 푼다                                          나의 도는 둥근 꼬리 같아 경우에 따라 돈다네

(頓釋百年疑)                                                            (吾道如環信所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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