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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Jun 15. 2021

거짓 소문을 퍼트린 능귀를 참형하다. - 상


☞ 水原記官能貴、龍駒戶長希進造妖言: "禁民間犬馬雞羔之色白者。" 命皆處斬, 傳示諸道。- 태조실록 7권, 태조 4년(1395년) 1월 6일 신축 2번째 기사
 
☞ 수원(水原) 기관(記官) 능귀(能貴)와 용구(龍駒) 호장(戶長) 희진(希進)이 요망한 말을 만들어, "민간에서 흰 빛깔의 개·말·닭·염소 등을 기르지 못 하게 한다."라고 하였으므로, 모두 참형에 처하여 여러 도에 전해 보이었다.
 
∴기관(記官); 지방 관아의 하급 관리
∴호장(戶長); 향리 직의 우두머리
 
태조 4년 흰 빛깔의 짐승을 기르지 못하게 막았다는 소문을 낸 죄로 능귀와 희진이라는 중간 관리자가 처형을 당했다. 아무리 근거 없는 소문을 냈다고 해도 목숨을 빼앗는 처사는 너무 과한 처벌이라는 생각이 든다. 능귀와 희진이 조선을 부정하면서 고려를 다시 일으키자는 것도 아닌데 참형을 내리다니, 도대체 어떤 부분이 문제가 되었던 것일까? 조선 시대에도 사형이란 제도는 왕의 재가가 있어야만 할 정도로 매우 엄격한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말이다.
 
능귀와 희진이 처형당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흰색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살펴봐야겠다. 오랜 기간 우리 선조들은 음양오행 사상을 바탕으로 한 오방색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황(黃), 청(靑), 백(白), 적(赤), 흑(黑)의 5가지 색으로 이루어진 오방색은 각각 방향과 함께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


황색은 오행 중 토(土)와 중앙에 해당하며, 우주의 중심을 상징한다. 그렇기에 나라의 근간이자 중심축인 왕만이 황색으로 만든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청색은 목(木)과 동쪽에 해당하며, 만물이 소생하는 봄과 생명을 상징한다. 그렇기에 생명의 탄생과 반대인 귀신을 쫓아내는 의미가 있다. 한 예로 선조들은 신선의 시중을 드는 아이를 청의동자가 앞일을 예견하거나 특정 인물을 도와주는 기이한 능력을 보여준다고 여겼다.
 
적색은 화(火)와 남쪽에 해당하며, 생성과 창조를 상징한다. 특히 귀신을 쫓는 색으로 많이 활용하였는데, 대표적으로 붉은 팥이 있다. 선조들은 붉은 팥으로 만든 시루떡을 아이 돌잔치나 이사하였을 때 꼭 먹음으로써 나쁜 귀신이나 액운을 쫓았다. 흑색은 수(水)와 북쪽에 해당하며, 죽음과 인간의 지혜를 상징한다. 선조들이 머리에 썼던 갓에 먹칠했던 것도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있다. 마지막으로 백색은 금(金)과 서쪽에 해당하며, 결백과 진실 그리고 순수를 상징한다. 우리 민족은 특히 백의민족이라 부를 정도로 흰색을 사랑했다.
 


출처 : 네이버


이처럼 오방색은 삼국시대부터 우리에게 좋은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그리고 흰 빛깔의 개·말·닭·염소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동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귀와 희진은 왜 흰 개·말·닭·염소를 기르지 못 하게 한다는 소문을 냈을까? 조선왕조실록에 정확한 사유가 나오지 않아 우리는 추측을 할 수밖에 없다.
 
능귀와 희진이 참형 당한 시점이 태조 4년인 1395년이라는 점에 우선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1395년은 조선이 건국한 지 3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권력을 장악하고 우왕과 창왕 그리고 공양왕까지 세 명의 고려왕을 죽인 뒤 조선을 건국했다. 이 과정에서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백성을 지켰던 최영 장군과 성리학의 조종으로 추앙받았던 정몽주도 죽였다.
 
고려는 멸망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고려가 있었다. 고려가 무능력하여 권문세족이 부정·비리를 저지르고,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으로 삶이 어려워도 475년간 존속했던 시간은 무시할 수 없었다. 관료들은 변방 출신의 무장 이성계가 사병을 이끌고 왕위를 찬탈했다고 여겼고, 백성들은 혼탁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들을 보살펴주고, 올바른 길을 인도해주는 최영과 정몽주를 죽인 역적이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아무 잘못도 없는 9살의 어린 아이에 불과했던 창왕(1380~1389)을 공민왕의 자손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죽이고, 등 떠밀려 왕위에 오른 공양왕(1345~1394)은 정치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죽인 사실에 몹시 화가 나 있었다. 태조 이성계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왕씨를 강화와 거제도 등 섬과 변방으로 거처를 옮기게 한 뒤, 태조 3년(1394년)에 왕씨를 모두 죽였다. 강화에 있던 왕씨 일족을 강화나루에 빠뜨려 죽이고(태조 3년 4월 15일), 거제도에 있던 왕씨 일족은 바다에 빠뜨려 죽이고(태조 3년 4월 20일), 중앙과 지방에 왕씨의 남은 일족을 찾아 모두 목 베어 죽였다(태조 3년 4월 20일). 그리고 최종에는 왕씨 성을 쓰지 못하도록 하였다(태조 3년 4월 26일)
다만 막강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진 조선에 해코지를 당할까 숨죽이고 있을 뿐이었다. 특히 고려 시대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조선이 곧 멸망하고, 고려가 다시 일어설 것이라 믿으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조랭이떡이다. 세시 음식 중 하나인 조랭이떡은 개성지방에서 즐겨 먹던 음식으로 흡사 땅콩을 까기 전 모습 또는 눈사람처럼 생겼다. 고려의 수도 개성에 살던 사람들은 어느 지역보다도 이성계가 세운 조선을 인정하지 않고, 고려왕조가 다시 일어서기를 바랬다. 그래서 가래떡 끝을 비틀어 잘라버리면서 조선에 대한 복수와 고려의 부활을 다짐했다는 설이 있다.
 


조선을 인정하지 않은 또 다른 이야기로 두문동 72현이 있다.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을 거부하는 고려의 유신들은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골짜기로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던 조의생, 맹호성, 서중보 등 72명이 부조현 고개에서 조복(朝服)을 벗고 은둔하자, 많은 유생이 이들의 뜻을 따라 조선의 관리로 나아가지 않으려 했다. 유생들이 태조가 직접 연 과거시험에 한 명도 응시하지 않고 경덕궁 앞의 고개를 넘어가자, 조선은 두문동에 불을 질러 72명을 모두 죽였다고 한다.
 
무엇보다 고려 시대 기득권을 가진 권문세족과 호장들에게 가장 큰 불만을 안겨준 것은 토지개혁이었다. 1391년 제정된 과전법은 고려 말 토지 문제를 해소하는 동시에 조선 건국에 참여하는 신진 관료들에게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주기 위한 목적이 컸다. 그러기 위해 권문세족과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은 호장들의 토지를 빼앗았다. 그리고 경기에 한하여 전‧현직 관료를 18등급으로 나누어 수조권을 부여하면서 세습을 허용하지 않았다.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토지를 가졌던 고려 말 기득권자들이 조선 건국으로 생활 기반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를 움직이는 원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다. 영국과 미국 그리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던 원인도 경제적 궁핍이었고, 모든 왕조의 멸망에도 부의 재분배 실패가 밑바탕에 깔려있다. 새로운 국가 성립의 성공 여부는 일부 세력에 편중되어있는 부를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분배할 능력을 갖추었는가로 판명될 수 있다. 즉, 기존의 기득권 반발을 이겨낼 힘을 가졌는지가 왕조 유지의 관건이었다.  -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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