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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Jul 06. 2021

아내를 학대한 남편을 참수하라


☞問祀神之禮, 答曰, "國有神堂, 人畏之不得近而視之, 若有嫌人, 則憑巫人祝神, 巫傳神語曰, ‘當焚其家。’ 卽起神火, 只焚其家, 暫不延燒隣家, 其可畏如此。 若男夫因酒虐妻, 妻卽入神堂, 則國家卽斬其男夫, 不斬則投諸遠島, 故男夫畏妻如虎。- 세조실록 27권, 세조 8년(1462년) 2월 28일 계사 4번째 기사
 
☞신(神)에게 제사하는 예(禮)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라에 신당(神堂)이 있는데 사람들이 무서워하여 가까이 가서 볼 수 없으며, 만약 남에게 혐의(嫌疑)가 있으면 무당[巫人]에게 부탁하여 신(神)에게 축원(祝願)하는데, 무당이 신(神)의 말을 전(傳)하기를, 「마땅히 그 집을 불태워야 한다.」 하면, 즉시 신(神)의 불이 일어나서 다만 그 집만을 불태우고 잠시라도 그 이웃집으로 불이 옮겨붙지는 않으니, 그것이 두렵기가 이와 같다. 만약 남편이 술로 인하여 아내를 학대(虐待)하여 아내가 곧 신당(神堂)으로 들어가 버리면, 나라에서 즉시 그 남편을 목 베는데, 목 베지 않으면 먼 섬에다 던져 놓기 때문에 남편이 그 아내를 호랑이처럼 무서워한다.
 


인류가 한곳에 정착하는 신석기 시대부터 삶의 방향이 크게 달라졌다. 수렵과 이동 생활을 하며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던 시대에는 모계 위주의 무리 생활이 이루어졌다. 상대적으로 근력이 센 남자는 먹이를 구하기 위해 사냥과 채집을 나가야 했는데, 이 일은 생명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했다. 실제로도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어린아이들을 외부의 적으로부터 지키고, 병이나 굶주림으로 죽지 않도록 무리를 보살피는 여성의 역할이 중요했다. 하지만, 농경 생활이 시작되면서 남자는 위험한 사냥을 무리하게 나갈 필요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시간만큼 무리를 지키면서 지도자의 역할을 여성으로부터 가져왔다.
 
남자들은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지키는 데 필요 이상으로 여성을 억압했다. 그 결과 가부장적 사회가 형성되었고,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이 세계적으로 보편화되었다. 사회 조직의 가장 하부조직인 가정에서도 남자는 부부간의 위계질서를 강조하며 남성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런 현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지역에서 진행되었고, 오늘날에도 남성 위주로 사회가 운영되고 있다.
 
남성 위주의 사회를 풍자하고 비만한 영화들이 많이 제작되었다. 대표적으로 니콜 키드먼이 주연으로 열연했던 영화 <스텝포드 와이프>가 있다. 이 영화는 가부장적 사회의 삐뚤어진 모습을 풍자하면서,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여러 생각과 울림을 주었다. <스텝포드 와이프>에서 니콜 키드먼이 연기한 방송인 조안나는 잘 나가는 여성 방송인이었다. 그러나 프로그램이 선정적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직장을 잃고 코네티것의 한 마을인 스텝포드로 이사하게 된다. 새로 이사한 스텝포드에 사는 여성들은 남편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늘 원피스와 하이힐로 자신들을 가꾸고 있었다. 남편들은 아내를 소유물로 여기며 자신들의 뜻대로 아내들이 움직이는 것을 자랑거리로 여겼다. 이런 가부장적 사회에 불만을 표출하고 비판하던 조안나와 남편 월터도 어느새 이들과 같은 행동을 하며 동화되어 간다. 이처럼 오늘날의 서구에도 가부장적 요소가 여전히 남아있으며, 많은 이들이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아시아도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 오랫동안 가부장적 사회를 운영해왔고, 그만큼 남성의 권위는 무척이나 강했다. 차이와 차별을 인정하는 유교는 남자의 우위를 인정하는 가부장적 사회를 지향했다. 때로는 남성이 폭력을 통해 여성을 억압하는 것이 어느 정도 용인될 만큼 남존여비라는 개념이 한‧중‧일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 정착되었다. 그러나 중국과 바다를 두고 멀리 떨어진 유구는 유교 문화가 상대적으로 덜 유입되면서 가부장적 모습이 강하지 않았다.
 
유구는 일본 오키나와현에 있던 옛 왕국으로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잇는 해상로에 위치한 나라였다. 15세기에 통일 왕국을 이룬 유구 왕국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에 조공을 바치며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가진 나라였다. 1879년 일본의 침략으로 멸망하기까지 독립을 유지했던 왕국이었던 만큼 조선은 유구 왕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며 관리하였다. 그 과정에서 조선과 너무도 다른 유구 왕국의 문화에 놀라움을 표출하였다. 그중의 하나가 부부관계였다.
 
가부장적 사회를 추구하던 조선으로서는 유구 왕국의 부부관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남편에게 매를 맞은 아내가 신당에 들어가면, 국가가 남편을 처형하거나 먼 섬에 내다 버린다는 소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고려와 달리 여성의 권리를 빼앗으며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사회를 만들어가는 조선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의 부부간의 폭행이나 살인이 일어나면 어떻게 처리했을까? 우선 가해자가 남성이냐 여성이냐에 따라 처벌이 달랐다. 조선은 중국 대명률을 토대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처벌했다. 대명률에 따르면 아내가 남편을 때리면 아무런 상처가 없어도 장 100대의 처벌을 내렸다. 장 100대의 처벌은 코와 귀를 훼손하거나 뼈에 금이 갈 정도로 구타한 사람에게 내리는 형벌 수준이었다. 만약 남편이 아내에게 구타를 당해 병에 걸릴 정도로 상해를 입으면 아내를 교형에 처했다. 남편이 다치는 것을 넘어 아내에게 죽으면, 아내의 목을 베는 참형을 구형했다. 아내의 의도된 살인의 경우에는 이유를 따지지 않고 사지를 찢어 죽이는 능지처사에 처했다.



반면 남편이 아내를 때렸을 경우에는 뼈가 부러지는 중상이 아니라면 처벌받지 않았다. 더러 뼈가 부러질 정도로 심한 상해를 입더라도 일반 상해 사건의 처벌 수위에서 2등급을 감해주었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는 눈과 귀에서 피가 나거나 피를 토할 정도로 내장이 손상되는 폭행을 저지른 사람에게 장 80대를 때렸다. 그러나 아내인 피해자인 경우는 물건으로 상해를 입힌 사람에게 내려지는 태 40대에 해당하는 처벌이 내려졌다. 남편이 교형에 처해지는 것은 아내를 죽였을 때뿐이었다.
 
남성과 여성의 처벌 수위의 격차는 조선 전기에서 후기로 갈수록 더욱 심하게 벌어졌다. 성리학이 강조하는 가부장적 질서가 사회적으로 뿌리내리면서, 남편의 폭력은 아내를 죽이지만 않으면 사회적으로 용납되고 묵인되었다. 또한 양반 계층보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생활이 어려운 하층민에게서 가정폭력이 더 많이 일어났다. 조선 후기에는 남편에게 맞아 뼈가 부러지는 큰 상해를 입어도, 아내가 직접 관아에 신고하지 않으면 조사와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남편의 폭행이 묵인되는 상황에서 아내가 관아에 신고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배움이 짧아 가정폭력에 대처하는 방법도 모르는 하층민의 여성들은 신고할 수 있는지도 몰랐다. 혹은 신고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도 지금처럼 격리조치라는 보호장치나 이혼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신고할 수 있는 아내는 얼마나 되었을까?



그나마 양반 계층에서는 친정 식구들에 의해 남편 폭력에 저항할 수 있는 기반이 조금은 마련되어 있었다. 태종 때에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을 가능하게 하고, 세종 때에는 집현전의 대제학으로서 활동했던 변계량(1369~1430)이 태종 12년(1412년)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사직을 청한 일이 있었다. 변계량이 이촌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내를 방에 가두고, 창구멍을 통해 음식물을 넣어 주며 감금하였다. 아내가 오줌을 누러 화장실에 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 등 학대를 저지른 사실을 알게 된 장인 이촌이 화가 나서 변계량의 아내를 데려간 뒤 사헌부에 고발하였다.
 
소송을 당한 변계량은 태종에게 다른 아내를 얻은 것이 소송을 당한 이유라고 밝혔다. 아내와의 불화로 문제를 일으킨 상황에서 자신의 병이 더욱 심해지니 관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태종에게 말했다. 그러나 태종은 “비록 성인이라도 작은 허물이 있는 것을 면치 못하거든, 하물며 그 아래 가는 사람이겠는가? 만일 지금 변계량을 파직하면 문한(文翰)의 임무를 누가 감당하겠는가?”라며 두둔하며, 변계량이 가정폭력을 묵인하였다.
 
태종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 시대는 남성이 여성을 폭행하는 가정폭력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다. 가정폭력은 작은 허물이라고 말하며, 남성의 사회적 능력을 더욱 높게 평가하였다. 왕조차도 가정폭력을 개인의 사소한 일로 치부할 정도였으니, 아래 사람들이 가정폭력을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나마 변계량의 처는 양반 가문이었기에 친정아버지가 집으로 데려가 보호할 수 있었다.
 



양반 계층의 가정폭력에 대한 대처가 이 정도였다면, 평민에게서 벌어지는 가정폭력에 대한 정부의 대처가 매우 형편없었음은 보지 않아도 자명하다. 1904년 황씨 살인 사건이 있었다. 남편 안재찬은 같은 마을에 사는 정이문이 자신의 아내가 거처하는 방에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아내가 겁탈당한다고 생각한 안재찬은 방으로 쫓아 들어가 정이문을 내쫓았다. 그리고 아무 죄도 없던 아내 황씨를 다듬이질할 때 쓰는 단단한 홍두깨로 마구 때렸다. 그러나 사건이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정이문의 할아버지가 관아에 출두하여 정이문과 황씨가 5~6년간 정을 나눈 사이라고 진술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한 안재찬은 아내를 죽인 뒤, 자살했다고 관아에 거짓말하였다. 사인을 검사한 결과 황씨가 자살한 것이 아니었음이 밝혀졌지만, 죄를 지은 아내를 죽인 것은 죄가 아니라는 대명률에 따라 안재찬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같은 해 영천군에 사는 이재길은 다른 여인과 정분을 통했다. 남편의 외도를 참지 못한 아내 성소사는 이재길에게 다른 여인을 만나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이재길은 성소사의 말에 “아녀자가 남편 하는 일에 간섭하고 투기를 부린다.”라며 매질을 하여 아내를 죽였다. 살인을 저질렀음에도 이재길은 관아에서 당당했다. 이재길은 우선 성소사가 재가녀라는 점을 강조했다. 재가녀로 20년이나 함께 살았음에도 자식을 낳지 못했기에 자신이 다른 여인을 만난 것은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일이라고 밝혔다. 또한 성소사가 평소에도 베 짜기 등 집안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문제를 저질러왔기에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주장했다.
  
조선 시대의 가정폭력은 남편이 아내를 때리거나 죽이는 것에 국한되지 않았다. 남자의 친인척이 아내를 폭행하는 것도 묵인되었다. 울산에 살던 최소사는 남편을 여의고 혼자 살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결혼하지 않은 사촌 시동생 김윤기가 최소사의 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김윤기는 사촌 형수 최소사를 통해 숙식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최소사의 재산에 마음대로 사용하며 탕진했다. 최소사가 이를 문제 삼으면 거침없이 발길질하는 등 폭행도 서슴지 않았다. 최소사가 주변에 도움을 요청해도 친척은 물론 이웃들도 가족 문제라며 외면했다. 더는 버티지 못한 최소사는 복어 알을 넣은 죽을 김윤기에 먹여 죽였다.
 


이처럼 가족과 사회 그리고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했던 여성들이 대응할 방법은 많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 수 없었고, 하소연한다고 해도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많은 여인들은 도망을 선택했다. 도망친다고 삶이 나아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도망쳤다. 도망치다 걸리면 국가로부터 장 100대를 맞은 뒤, 남편에 의해 남의 집 종이나 첩 또는 창기로 팔릴 위험을 감수하고 말이다.
 
가정폭력에서 도망치는 경우는 살겠다는 의지를 가진 일부 용기 있는 여성들이나 가능한 일이었다. 모두에게 외면받고 고립되어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여성들은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자살을 선택했다. 그러나 죽은 이후에도 동정보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부모보다 먼저 죽었다는 점에서 불효자의 멍에를 뒤집어써야 했고, 어려움을 이겨낼 의지도 없는 소인배가 되어야 했다. 간통과 연관된 경우에는 없던 죄도 만들어졌고, 죽어 마땅한 여인이라는 비난을 사후에도 받아야 했다.
 
가정폭력을 당하는 여성들의 가장 적극적인 대응은 보복 살인이었다. 그러나 보복 살인의 경우도 여성 자신만을 위해 일으킨 사례는 많지 않다. 자식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가정폭력의 경우 자녀에게까지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 과정에서 많은 여인이 어린 자녀들의 고통을 더는 보지 못하고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



이처럼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묵인되었던 조선에서 유구의 풍습은 어떤 모습으로 비추어졌을까? 아마도 위아래도 모르는 금수의 나라로 여기며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이야말로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올바르게 생활하고 있다며 자부심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본다면 조선 시대의 가정폭력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야만스럽고 부끄러운 역사로 느껴진다. 그러나 요즘도 우리는 남성에 의한 가정폭력 소식을 종종 듣는다. 또한 최근에는 다문화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가정폭력문제가 급증하고 있다. 타국에서 온 아내를 폭행하는 남자들은 “우리나라에 왔는데 말이 서툴다. 우리 문화를 이해하지 않는다. 게으르다. 고국에 있는 친정에 돈을 많이 보낸다.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았다.” 등의 이유로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어떤 변명으로도 이들의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이제는 우리가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는 서로 동등하고 존중받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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