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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Jul 27. 2021

여인이 아닌 황진이로 살다.


조선을 대표하는 여인 중에서 시대의 가치관과 보편적인 이념을 거부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간 여인은 단연코 황진이다. 황진이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야사로 적혀있어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운 점이 있지만, 아름다운 용모와 재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삶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황진이는 양반인 아버지와 천민인 어머니 사이에서 얼녀로 태어났다. 황진이는 얼녀 대부분이 사대부의 첩으로 살아가던 당시의 일반적인 형태를 거부하고 기녀가 되었다. 뛰어난 용모의 황진이를 보러오는 사람들은 많았으나, 황진이는 선택받기보다는 선택하는 여인이었다. 뛰어난 학식과 덕망 등을 갖추고 있어야 비로소 황진이를 만날 자격이 생겼다. 황진이는 기다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스스로 뛰어난 인물을 찾아가 만남을 갖기도 하였다.
 





황진이가 만났던 사람으로 벽계수가 있다. 세종의 서자 영해군의 손자였던 벽계수는 지인들에게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공언하고 다녔다. 이를 들은 황진이는 벽계수를 유혹하여 사랑에 빠뜨린 뒤 망신을 주었다. 이외에도 당시 살아있는 부처라 불리던 지족선사의 마음도 흔들어 파계시켰다. 그러나 도학군자로 불리던 서경덕만은 유혹하는 데 실패했다. 황진이는 고명한 서경덕의 인품과 학식에 감복하여 제자가 되기를 청하며,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에도 황진이는 당대 유명한 인물들과 만남을 계속 이어갔다. 한양 제일의 소리꾼이던 이사종과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랑을 나눴고, 황진이와 한 달이면 헤어질 수 있다고 자신한 소세양의 콧대를 무너뜨리는 등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여성과 얼녀 그리고 기생이라는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다. 늘 마음 깊은 곳에 외로움이 가득했던 황진이는 40살을 전후로 생을 마감하고 개경에 묻혔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청산리 벽계수>, <박연>, <동짓달 기나긴 밤을>, <여소양곡> 등이 전하고 있다.
 
<청산리 벽계수야>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 허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 허니 쉬어간들 어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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