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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Aug 03. 2021

종묘의 신병(神兵)이 왜군을 내쫓다. (상편)


임진왜란 발발 초기 조선은 저항다운 저항 한번 없이 일본군에게 길을 내주었다. 일본군은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이후 제대로 된 전투 없이 보름 만에 조선의 수도 한성을 점령한다. 조선의 국왕 선조를 비롯한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백성들을 버리고 밤에 야반도주했다. 지방 곳곳의 모든 관찰사와 수령이 일본군이 보이기도 전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는 말만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때마다 백성들은 불안하고 초조했다. 어느 위정자도 자신들을 지켜줄 생각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보호해달라고 말하고 싶어도 그들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불안하고 초조하던 차에 일본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도 한성의 가장 중심부에서 아군의 피해는 한 명도 없이 일본군을 내쫓겼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


선조실록에 의하면 종묘에 들어온 일본군을 신병(神兵)이 공격하여 내쫓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공식적인 첫 승리가 5월 7일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함대를 무찌른 옥포 해전이다. 그러나 이보다 이른 5월 3일 종묘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를 상대로 전투를 벌여 남별궁으로 쫓아냈다고 하니 매우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의 첫 승리이면서 그 대상이 일본군 총사령관이라는 점에서 듣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다. 그러나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한 주체가 신병 즉 귀신으로 이루어진 군대라는 점에서 믿을 수 있는 이야기인지 고민하게 된다.

우선 임진왜란 발발 초기 일본군을 상대로 연전연패했던 가장 큰 이유를 살펴보아야 한다. 조선은 16세기 이후 사화와 당쟁으로 정치와 경제 그리고 국방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았다. 훈구파들의 부정부패로 백성들의 삶이 파탄 난 상황에서 위정자들은 백성들의 삶을 외면한 채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당쟁만 일삼았다. 백성들의 삶의 기반이 무너진 상황에서 군역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대립제와 방군수포제로 적군이 쳐들어왔을 때 싸울 수 있는 병력이 얼마 되지 않았다. 군인이 없는 상황에서 각 고을이 독자적으로 적군을 맞아 싸우는 진관체제는 무용지물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정부는 전쟁이 일어나면 각 읍의 수령들이 군사를 이끌고 지정된 장소로 집결하게 한 뒤, 중앙에서 파견한 병·수사가 군대를 지휘하는 제승방략을 조선 중기부터 운영하였다.
 



그러나 막상 임진왜란 당시 대규모의 일본군이 조선에 상륙하자, 제승방략도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각 고을의 수령과 병·수사들은 군대를 모집하여 약속된 장소로 가지 않고, 제 살길만을 찾아 도망치기에 바빴다. 대표적으로 여진족 이탕개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적이 있던 이일은 경상도 상주에서 일본군을 만나자마자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쳤다. 종사관이던 윤섬이 도망치는 이일을 향해 “국은이 망극한데 싸우지도 않고 도망치느냐? 남자가 절개를 지키고 의를 위해 죽어야지.”라며 꾸짖을 정도였다. 비단 도망치는 장수들은 이일 만이 아니었다.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였던 원균은 일본군이 몰려오자 자신이 타고 갈 병선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바다에 빠뜨리고 도망쳤다.


제승방략으로 그나마 모은 오합지졸을 데리고 조선을 지키고자 한 신립 장군은 험준한 조령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막자는 김여물의 주장을 거절했다. 기병으로 여진족을 상대로 큰 승리를 여러 번 거두었던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일본군이 가진 조총의 위력과 마침 밤새 내린 비로 뻘밭이 된 탄금대에서 기동력이 봉쇄되면서 패배하고 만다.
  



선조는 믿었던 신립 장군마저 일본군에 패배했다는 소식에 몽진을 준비한다. 그러면서 우의정 이양원을 수성 대장으로 삼은 뒤 이전을 좌위장, 변언수를 우위장, 박충간을 순검사로 임명하여 한성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도원수에 김명원, 부원수에는 신각을 임명하여 한강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왕부터 도망갈 준비를 하는데, 한강과 한성을 지켜야 하는 관료와 병사들이 있을 리 없었다. 도검찰사 이양원과 도원수 김명원은 왜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이탈했고, 7,000여 명의 병졸들은 제각각 살아남기 위해 도망치기 바빴다. 오로지 부원수 신각만이 흩어진 병사를 수습하여 양주 해유령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을 뿐이다. 지상에서 조선군의 첫 승리였지만, 임진강에 도착한 도원수 김명원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군대를 이탈했다는 잘못된 보고로 신각은 처형당하고 말았다.
 
반면 일본군의 입장에선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1572~1655)가 이끄는 20여만 명의 군인들은 두 갈래로 나누어 서울로 진격하였다. 일군은 양지와 용인을 거쳐 한강으로 들어오고, 나머지 일군은 여주와 이천을 거쳐 용진으로 올라왔다. 한강 남쪽 언덕에 도착한 일본군이 조선군의 방비 상태를 떠보기 위해 거짓으로 헤엄쳐 건너려 하자, 한성과 한강 방어를 맡은 장수들과 병졸들이 겁을 먹고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일본군은 조선군이 싸우지도 않고 물러나는 것을 보고 함정이 아닐까 우려하였다. 한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흥인문 가까이 왔으나 어디에도 조선의 병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군에게 들어오라는 듯 흥인문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일본군은 성내로 끌어들인 뒤 일시에 포위하여 섬멸하려는 조선군의 작전이라 생각하고, 십수 명의 군사를 뽑아 한성 곳곳을 살펴보게 하였다. 그러나 한성의 가장 중심부인 종루까지 들어와도 조선군 한 명도 없었다. 그제서야 안심한 일본군은 한성에 무혈입성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400km에 가까운 천릿길을 보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무장한 채 걸어서 올라온 만큼 몸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일본군들은 부르터진 발로 인해 간신히 거동하는 자가 많았다. 만약 왕이 도망가지 않고, 한성과 한강의 수비를 맡은 장수와 병졸들이 죽기 살기로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면 어땠을까? 왕이 백성을 절대 버리지 않는다는 믿음을 갖은 관군과 의병이 서울로 올라왔다면, 오히려 일본군을 포위하여 임진왜란은 쉽게 끝났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한성에 일본군을 데리고 입성한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는 불과 20살에 불과한 어린 장수였다. 일본 총사령관이면서 제8군 사령관이기도 했던 우키타 히데이에는 일본 비젠 지역을 영지로 삼은 다이묘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양자로 삼을 정도로 매우 총애하는 장수였다. 우키타 히데이에의 아버지 우키타 나오이에는 병사하기 직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불러 아내와 10살 된 아들을 부탁했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우키타 나오이에의 부인을 자신의 첩으로 삼고, 우키타 히데이에를 양자로 삼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얼마나 우키타 히데이에를 아꼈는지, 자신의 이름의 일부인 ‘秀(히데)’를 사용하도록 허락해 주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녀를 아내로 주었다. 우키타 히데이에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임과 총애에 어긋나지 않게 기슈, 시코쿠, 규슈 정벌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어린 나이에 군공을 쌓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총애를 듬뿍 받은 우키타 히데이에는 한성에 입성하면서 입꼬리가 올라갔다. 조선의 국왕 선조만 잡아 항복을 받으면, 가장 큰 공로를 인정받아 막강한 권력과 부를 쥐게 될 것이라는 상상에 기뻐했다. 하지만, 한성에 입성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과 다른 현실에 좌절했다. 그리고 분노했다. 전쟁에 지면 깨끗이 항복하고 할복자살하는 일본과는 달리 조선의 왕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버렸다. 우키타 히데이에는 자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조선 국왕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기쁨은 잠시였다. 다시 북으로 올라가서 조선 왕을 잡아야 한다는 중압감이 우키타 히데이에를 억눌렀다. 


- 내일 하편이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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