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정호 Aug 04. 2021

종묘의 신병(神兵)이 왜군을 내쫓다. (하편)


조선 왕이 사라진 것에 화가 난 우키타 히데이에는 분풀이로 조선 왕이 머물던 궁궐을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선조의 몽진에 화간 난 백성들이 궁궐을 불 질렀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도망친 선조가 죄책감을 느끼도록 왕릉을 파헤치고 도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선조가 선왕들의 위패를 가지고 갔다는 말에 종묘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조선에 온갖 모욕을 주고자 노력했다. 그러면 조선이 효를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여기던 나라인 만큼, 선조가 한성으로 되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선조는 우키타 히데이에의 예상 범주에서 벗어난 인물이었다. 자신의 잘못을 아랫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떠넘기고, 공로는 혼자서 독차지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우키타 히데이에는 알지 못했다. 선조는 우키타 히데이에의 만행에 복수를 다짐하기는커녕, 명나라로 망명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히려 우키타 히데이에가 궁궐을 불태우고 왕릉을 파헤치며, 성스러운 종묘를 군대의 진지로 사용한 것에 대한 반발이 예상치 못한 존재로부터 나왔다. 낮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밤만 되면 어디선가 나타나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귀신으로 이루어진 병졸(이하 신병(神兵)이라 부름)들은 일본군이 쏜 조총의 탄환을 맞아도 상처 하나 입지 않았고, 칼로 베어져도 곧 다시 붙었다. 오히려 일본군이 종묘에 등장한 신병을 향해 쏜 탄환은 건너편의 일본군을 맞추어 다치게 하거나 죽게 했다. 신병을 향해 어떠한 공격을 해도 통하지 않자, 일본군은 신병에 대한 무서움에 눈을 감고 칼을 마구 휘둘렀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서로 간에 휘두른 칼로 상처를 입거나 죽는 일이 많았다.

우키타 히데이에는 신병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부하 장수들을 닦달하며 신병을 잡아 정체를 밝혀내라고 연신 독촉하였다. 20살의 젊은 장수였지만 20만에 가까운 총 병력을 책임지는 자리를 맡은 총사령관이었다. 신병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서도 안 되고, 신병에게 일본군이 속수무책으로 당한다는 사실이 퍼져서도 안 되었다. 조선의 국왕 선조를 잡지 못해 전쟁이 길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과 초조함에 사로잡힌 일본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트릴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러 날이 지나도 신병은 잡히지 않았고, 없어지지도 않았다. 결국 우키타 히데이에는 종묘에서 신병과 싸우는 것보다는 빨리 주둔지를 옮기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했다. 그리고 얼마 후 소공동에 자리하고 있던 중국 사신이 머물던 숙소인 남별궁으로 진영을 옮겼다.
 


신병을 만난 이후 우키타 히데이에는 연신 안 좋은 일이 생겼다. 종묘의 신병이 나타난 이후, 이순신 장군은 남해안에서 일본군을 맞아 연신 승리를 거두었고, 특히 한산도에 수군 진영을 설치하여 일본 본토로부터 군수물자가 조선에 도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군수물자가 부족해진 일본군은 평양성에 머물며 더는 북쪽으로 진군하지 못했다. 곧이어 명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어 평양성을 빼앗겼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전공에 눈이 멀어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한성을 탈환하려는 것을 맞아 승리했으나, 그 기쁨도 잠시였다.
 
우키다 히데요시는 권율 장군이 수원의 독산성으로 들어가자, 2만 명의 병력으로 포위했다. 그리고 성으로 들어가는 물줄기를 막아 고립시켜 승리를 거두려 하였으나, 권율이 쌀로 말을 씻기는 모습을 보고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곧이어 행주산성에서 권율에게 큰 패배를 당한다. 우키타 히데이에는 해발 70~100m밖에 안 되는 낮은 능선에 축조된 행주산성에 4천 명의 관군과 의병을 거느린 권율을 상대로 승리를 자신했다. 벽제관에서 이여송을 이긴 만큼 일본군의 사기도 매우 높은 상태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일본군의 명장을 모두 소집하고 총 병력이 3~4만 명이나 되었기에 손쉬운 승리를 자신했다. 하지만 행주산성의 공격은 실패하고 퇴각해야 했다. 총장수로서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90512911

이때부터 우키타 히데이에는 되는 일이 없었다. 젊은 나이인 데다 임진왜란에서 큰 전공보다는 패배가 많았던 만큼 부하 장수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 특히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는 우키타 히데이에를 총장수로 인정하지 않고, 앞에서 대놓고 의견 충돌하며 싸웠다. 그러나 우키타 히데이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임을 받고 있는 만큼 정유재란까지 장수로서 참전했으나, 잦은 실책으로 구설수에 자주 오르내렸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으로 돌아간 우키타 히데이에는 종묘에서 만난 신병을 평생 원망하지 않았을까? 신병을 만나기 전까지 우키타 히데이에는 하는 모든 일이 승승장구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이자 사위로 일본군의 총 장수에 오를 정도로 막강한 권력과 명예를 지니고 있었다. 부산에 상륙한 지 보름 만에 한성에 입성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전공도 올렸다. 그러나 종묘에서 신병을 만나고 나서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에도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하치조 섬으로 유배 보내졌다. 이곳에서 50년을 살다가 83세로 죽으면서, 자신의 꼬인 인생의 시점을 종묘에서 신병을 만났을 때로 기억하지는 않았을까?



우키타 히데이에가 아무리 어린 나이에 출정했다지만, 조선의 선대 왕들의 무덤을 파헤치는 만행을 저질렀다. 특히 나라의 근간이라고 생각하는 종묘에 군영을 설치하고 막돼먹은 짓을 하며, 효를 중시하는 조선을 욕보였다. 무엇보다도 아무 잘못이 없는 백성들을 죽이고 땅에서 내쫓았다. 우키타 히데이에 주도로 일본군이 조선에서 만행과 행패를 부리자, 조선을 건국한 태조부터 태종, 세종, 성종과 같은 성군들이 신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내쫓았을지도 모른다. 이승의 일에 개입할 수 없는 상황에서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 모두를 내쫓지 못하더라도, 자신들이 머무르는 종묘만큼은 일본군이 한 걸음도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지는 아니었을까? 아니면 선조가 비록 백성을 버리고 도망갔어도, 선대 왕들은 절대로 나라와 백성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종묘에서 신병이 등장하여 일본군을 내쫓은 사건이 임진왜란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선왕들의 애민정신을 보여주며 백성들의 충성을 끌어내는 데 일조하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신병이 나타난 이후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이 조선을 지키기 위해 의병이 되어 일본군과 맞서 싸웠으니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종묘의 신병(神兵)이 왜군을 내쫓다. (상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