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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Aug 10. 2021

조선 시대 단군에 대한 인식이 변하다.


일연의 <삼국유사>는 단군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단군과 고조선의 역사를 다룬 것은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여 국난을 이겨내는 데 목적이 있었다. 조선도 고려 말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면서 찬탈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건국의 정당성을 단군에서 찾았다.


조선이 국호를 “조선”으로 정한 이유로 “조선 단군이 동방에서 처음으로 천명을 받은 임금이며, 기자는 처음으로 교화를 일으킨 임금이다.”라고 제시했다. 이는 중국의 사대질서를 따르면서도, 중국과 대등한 역사와 민족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목적이 담겨있다.


기자를 중국의 요 임금과 같은 존재로 간주하고, 중국처럼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1412년(태종 12년)에는 평양의 기자 묘에 단군을 같이 제사 지내며, 단군과 기자를 조선 국왕으로 부르도록 하였다. 세조는 기자보다 단군을 강조하여 단군의 위패를 “조선시조단군지위”라 부르고, 기자의 위패를 “후조선시조기자지위”라 불렀다. 기자보다 단군을 더 중요한 인물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16세기 성리학이 뿌리를 내리면서 단군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단군 숭상을 중화질서에 어긋나는 행위로 여기며, 단군이 요 임금과 같은 시기의 인물이라는 점을 부정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시조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단군보다 중국의 문물을 전달해준 기자를 더 높이 평가하고 받들며 작은 중국이라는 의미의 “소중화”라는 인식을 가졌다.


17세기에 들어서자 국학운동이 일어나며 단군을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허목은 <동사>에서 단군조선을 정통 국가로 인식하였으며, 홍만종은 <동국역대총목>에서 단군-기자-삼국-통일신라로 이루어지는 역사를 제시했다. 18세기에는 단군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체계적인 결과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우리의 역사가 중국의 문물을 통해 발전한 것이 아니라, 단군이 나라를 세워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했음을 강조했다. 이종휘는 <동사>에서 기자를 부정하고 단군에게 정통성이 있다고 밝혔다. 이런 움직임은 정책에도 반영되었다. 숙종은 평양의 삼성사에 있는 단군의 축문을 “전조선(前朝鮮) 단군”이라 바꿨다. 정조도 단군을 우리나라 최초의 성인으로 여기며, 단군의 묘를 수리하고 잘 관리하도록 명하였다. 구한말에는 환인·환웅·단군을 삼신 일체로 신격화한 대종교가 창립되어 독립운동의 주축이 되었으며, 민중들에게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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