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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Sep 07. 2021

형에게 반기를 들다.


세종의 여섯 번째 아들 금성대군(1426~1457)은 문종 앞에서 수양대군과 함께 단종을 끝까지 보필하기로 약속했다. 문종 앞에서 단종 보필을 약속했던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자, 선왕의 유지를 지키지 못했다는 마음에 늘 불편했다. 아버지와 형의 유지를 어기고 어린 단종을 압박하는 수양대군을 몰아내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자신의 힘으론 불가능했다.

1455년(세조 1년) 세조가 단종을 내쫓고 왕으로 즉위하는 모습을 본 금성대군은 가까운 이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한탄하였다. 이런 모습을 눈여겨본 세조는 사육신 역모의 책임을 물어 단종을 강원도 영월로 유배 보낼 때, 금성대군도 유배형에 처했다. 삭녕에서 경기도 광주 그리고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지를 옮겨 다닐 때마다 금성대군의 마음은 억울함과 분노가 치솟았다.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이 세조의 집권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함께 세조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시키기로 약속하였다. 이들은 직접 군사를 모집하는 한편, 충청과 영남지역에 단종 복위에 참여할 군사를 모집하는 격문을 돌렸다. “순흥을 근거지로 한다. 죽령과 조령을 출동시켜 통신을 차단하고 영남을 장악한다. 단종을 순흥으로 모셔와 복위를 준비한다. 세조를 제거하고 심복을 제거한다.”라고 적힌 격문을 본 이들이 참여하면서, 거사 준비가 차근차근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들의 거사 계획은 어이없게도 관노에 의해 실패했다. 순흥부사 밑에 있던 한 관노가 출세하려고 일부러 금성대군의 시녀 금연과 정분을 통한 뒤 군사를 모집하는 격문을 훔쳐 달아났다. 관노는 훔친 격문을 가지고 서울로 향하다가, 행동거지를 이상하게 여긴 풍기현감에게 잡히고 말았다. 풍기현감은 관노를 죽이며 거사 계획이 세워나가는 것을 막았으나, 정작 자신이 거사가 성공할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관노가 격문을 훔쳐 달아날 정도로 허술하게 거사를 준비하는 모습에 실패를 확신한 풍기현감은 세조를 선택했다. 금성대군이 역모를 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접한 세조는 크게 화를 내며 금성대군에게 사약을 내렸다. 순흥부사 이보흠은 평안도 박천으로 유배 보내졌다가 처형당했다. 세조의 분노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순흥부를 풍기‧영천‧봉화에 분산시켜 귀속시킴으로써 행정구역에서 없애버렸다.
 

관노로 인해 거사를 실패한 금성대군은 1739년(영조 15년)에 정민이라는 시호를 받으며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1791년(정조 15년)에는 단종의 능인 장릉 배식단에 배향하는 육종영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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