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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Sep 01. 2021

빼앗길 뻔한 울릉도를 되찾다


512년 신라 장수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면서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영토로 편입되었다. 고려 시대에도 우리의 영토였음을 알려주는 문헌이 많이 남아있다. 고려 태조 13년 울릉도에서 토산물을 갖다 바쳤으며, 의종 때는 울릉도에 김유립을 보내어 중앙에서 관리했다. 그러나 현종 9년에 여진족이 울릉도를 노략질하자 많은 사람이 섬을 떠났다. 그 이후로도 여진족의 침략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고려 말 왜구까지 가세하자 울릉도에 남는 사람이 없었다. 국가가 보호해주지 않는 울릉도에서 목숨 걸고 살아갈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조선이 건국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조선의 강한 군사력에 왜구와 여진족의 침략이 확연하게 줄었다. 이제 울릉도는 위험한 장소가 아니라 기회의 섬이었다. 농사와 어업이 가능한 울릉도로 많은 사람이 터전을 옮겼다. 그러나 태종이 백성의 안전을 위해 섬에 살던 사람들을 두 번이나 뭍으로 불러들이면서, 울릉도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풍족한 삶에 대한 기대를 접어야 했다. 세종도 세 번에 걸쳐 울릉도민을 육지로 이주시키자, 울릉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어민이 어장이 풍부한 울릉도 주변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생계를 이어갔다.
 
1693년(숙종 19년) 어부 안용복이 울릉도로 조업을 나갔다가 일본에 피랍되었다. 안용복은 일본 호키 주 태수에게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일본 태수도 울릉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확인 문서를 내주었다. 안용복의 귀국 후 울릉도에 관심을 끌게 된 조선 조정은 울릉도와 독도의 소유권을 두고 에도 막부와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이며, 앞으로는 일본인은 절대로 울릉도 인근에서 조업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은 1,600년대 독도를 먼저 발견했고, 1905년(고종 42년) 러‧일 전쟁 당시 주인이 없는 섬이라 차지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광복 이후 미‧영‧중과 맺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독도를 돌려주라는 문구가 없으므로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대한민국은 일본과 국제 사회에 울릉도와 독도가 512년부터 계속 우리의 영토였음을 고지도와 고문서를 통해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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