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정호 Mar 15. 2022

남편의 약조를 믿었건만

중종은 반정군에 추대되어 반강제적으로 왕위에 올랐다. 반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중종은 어떤 일도 하지 않았고, 반정군도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거사를 일으켰던 만큼 즉위 초의 중종에게는 어떠한 실권도 없었다. 혼례식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자신의 아내 단경왕후(1487~1557년)의 폐위를 막을 힘조차도 없었다.      

단경왕후의 아버지는 신수근이었다. 신수근은 연산군의 장인 신승선의 아들로서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이었다. 반정을 일으키기 전, 박원종은 신수근의 의중을 알아보기 위해 그에게 누이와 딸 중에 누가 더 중요한지를 물었다. 이에 신수근이 총명한 세자가 지금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 거라고 답하자, 박원종은 거사 당일 신윤무와 이심을 보내 수각교에서 신수근을 죽였다.      


박원종은 중종이 즉위하면 단경왕후가 아버지를 죽인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조급해진 박원종은 중종을 찾아가 단경왕후는 역적의 자식이니 폐출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아무런 힘이 없던 중종은 왕이 된 지 7일 만에 박원종의 뜻에 따라 단경왕후를 사가로 쫓아내야 했다. 하지만 둘의 금실이 좋았던 만큼, 중종은 훗날 꼭 단경왕후를 궁궐로 데려오겠노라 약속했다.     


사랑하는 아내와 강제로 헤어진 중종은 경회루에 올라 단경왕후가 거처하고 있는 인왕산 아래 사직골을 바라보며 매일 아내를 그리워했다. 이 소식을 들은 단경왕후도 매일 아침 인왕산에 올라 커다란 바위에 붉은 치마를 둘러놓고 자신도 중종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단경왕후가 치마를 널어놓고 왕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그리워했다고 하여, 붉은 치마가 놓였던 바위를 ‘치마바위’라 불렀다.      


그러나 둘은 죽을 때까지 다시 만나지 못했다. 중종은 언제부터인가 단경왕후를 찾지 않았고, 단경왕후의 애절한 사연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치마바위 전설을 남긴 단경왕후는 오랫동안 홀로 쓸쓸히 지내다가 1557년(명종 12년)에 71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리고 1739년(영조 15년)에 왕비로 복위되었다. 단경왕후의 능은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온릉에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역사가 담긴 이러한 치마바위에 1939년 일제는 ‘대일본청년단결’이란 글귀를 새겨놓았다. 광복 이후 문구는 지워졌지만, 완벽하게 지우지 못해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승만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