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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Apr 12. 2022

발해의 진짜 멸망 원인은 뭘까?

중국을 정복하려는 야심을 가졌던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가 925년 12월 21일 추운 겨울 발해를 침공한다. 거대한 영토를 가졌던 발해는 별 저항도 없이 이듬해 1월 12일에 항복하였다. 그리고 항복 절차가 끝난 1월 14일, 발해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매우 강성했던 발해가 거란이 세운 요나라에 의해 너무도 허무하게 무너져버린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통치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발해는 고구려인과 말갈인이 연합하여 세운 국가로 이원적 구조의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인은 지배 계층으로 많은 권력과 부를 독점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당연하게 여기며 말갈인을 무시하고 핍박했다. 반면 말갈인은 주로 지방에서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예전의 수렵방식으로 생계를 꾸리며 조세를 부담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고구려 계통의 사람들과 말갈인은 하나라는 인식을 갖지 못하고 서로를 등한시하는 관계가 되면서 국론이 분열되었다.     


이런 가운데 9~10세기 국제 질서가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동아시아를 제패하며 영원할 것 같던 당나라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민족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만들었던 절도사는 오히려 당나라를 멸망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후 중국은 5대 10국이라는 혼란스러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신라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열왕 계통의 혜공왕(재위 765~780)이 피살된 이후 권력투쟁이 심하게 일어나면서 국가 운영 시스템이 망가져 버렸다. 새로운 지배 계층인 호족이 등장하고, 견훤과 궁예와 같은 인물들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며 오랜 기간 전쟁을 하였다.      


당과 신라가 힘을 잃자 나라 없이 약소민족으로 살아오던 거란족이 통합하여 요를 세우고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약해진 중국을 정복하기 위한 선제작업으로 발해를 공격하였다. 발해는 자신을 도와줄 당과 신라가 사라진 가운데 홀로 고군분투해야 하였다.백두산의 대폭발도 발해의 멸망에 크게 기여하였다. 백두산의 대폭발은 화산재를 하늘 위 25km 이상 올려 보내 저 멀리 일본에까지 떨어뜨려 놓았다. 이처럼 거대한 화산 폭발로 농경과 수렵이 다 무너진 가운데 요나라의 야율아보기가 군대를 끌고 오니, 발해는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나라를 내주어야 하였다.      


백두산 폭발로 발해가 망했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고려세가》와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백두산은 발해가 멸망한 이후인 938년과 939년 그리고 946년과 947년에 큰 폭발을 일으킨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고려세가》와 《고려사절요》는 발해 멸망을 기록한 《요사》를 참고하였는데, 《요사》 자체가 1344년 원나라 시대에 제작되어 왜곡된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죽었다는 것도 의심스럽게 한다. 아마도 화산 폭발의 영향으로 야율아보기가 죽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이 가설 모두가 틀린 것이라면, 발해가 926년에 망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고려사》에 934년 발해의 왕자 대광현이 수만 명의 발해인을 이끌고 고려에 투항했다는 기록은 발해가 멸망한 지 8년 뒤의 일이다. 나라가 망하고 8년이란 긴 시간 뒤에야 고려로 투항했다는 사실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다.     

나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망하지는 않는다.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문제를 일으켰을 때, 국가 시스템이 해결하지 못하면 무너지는 것이다. 발해도 몇 가지의 이유만으로 멸망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드넓은 만주 벌판과 연해주가 우리의 영토에서 멀어졌다는 아쉬움에 발해의 멸망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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