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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May 10. 2022

일본군을 물리친 귀신 군대 3/3

오히려 우키타 히데이에가 궁궐을 불태우고 왕릉을 파헤치며 성스러운 종묘를 군대 숙소로 사용한 것에 대한 반발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왔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존재가 밤만 되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귀신으로 이루어진 병졸, 즉 신병은 일본군이 쏜 조총의 탄환에 맞아도 상처 하나 입지 않았고, 칼로 몸이 베어져도 곧 다시 붙었다. 일본군이 종묘에 등장한 신병을 향해 쏜 탄환은 건너편의 일본군을 맞추어 다치게 하거나 죽게했다. 신병에게 어떠한 공격도 통하지 않자 두려워진 일본군은 눈을 감고 칼을 마구 휘둘렀다. 이로 인해 자신들이 휘두른 칼에 맞아 상처를 입거나 죽는 일본군이 늘어만갔다.     


우키타 히데이에는 부하들이 보고하는 신병의 존재를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애꿎은 부하 장수만 닦달하며 신병을 잡아 정체를 밝혀내라고 연신 독촉하였다. 그는 20살의 젊은 장수였지만 20만에 가까운 총 병력을 책임지는 자리를 맡은 총사령관이었다. 신병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다. 더욱이 신병에게 일본군이 속수무책으로 당한다는 사실이 퍼지면 일본군 사기가 크게 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예상했다. 하지만 여러 날이 지나도 신병은 잡히지 않았고, 사라지지도 않았다. 결국 우키타 히데이에는 종묘에서 신병과 싸우는 것보다는 빨리 주둔지를 옮기는 것이 전략적으로 낫겠다고 판단했다. 얼마 후 그는 종묘를 불태우고 중국 사신이 머물던 숙소인 소공동 남별궁으로 군대 진영을 옮겼다.      

신병을 만난 이후 우키타 히데이에에게는 계속 안 좋은 일만 생겼다. 바다에서 일본 수군이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 패했다는 소식만 연신 들려왔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 수군 진영을 설치하여 일본 본토에서 오는 군수물자가 조선에 도착하지 못하게 만들자, 군수물자가 부족해진 일본군은 평양성에 머물며 더는 북쪽으로 진군하지 못했다. 곧이어 명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자, 전세가 역전되어 일본군은 평양성을 빼앗겼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공로에 눈이 멀어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한성을 탈환하려는 것을 간신히 막아냈으나, 그 기쁨도 잠시였다.      


우키타 히데이에는 한성을 탈환하려는 권율 장군이 수원의 독산성으로 들어가자, 2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포위했다. 성으로 들어가는 물줄기를 막아 조선군을 고립시켜 승리를 거두려 하였으나, 권율이 쌀로 말을 씻기는 모습에서 성안에 물이 풍부하다고 생각한 우키타 히데이에는 독산성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얼마 뒤에는 행주산성에서 두 번째로 만난 권율에게 큰 패배를 당했다.      


우키타 히데이에는 해발 70~100m밖에 안 되는 낮은 능선에 축조된 행주산성에 4,000명의 관군과 의병을 거느린 권율을 상대로 승리를 자신했다. 벽제관에서 이여송을 이긴 만큼 일본군의 사기도 매우 높은 상태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일본군의 명장을 모두 소집했고, 총 병력도 3~4만 명이나 되었기에 손쉬운 승리를 자신했다. 하지만 행주산성을 향한 공격이 거듭 실패하면서 아무 소득도 없이 퇴각해야 했다. 총사령관으로서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우키타 히데이에에게는 되는 일이 없었다. 젊은 나이인 데다 임진왜란에서 승전보다 패전이 많아지면서 부하 장수들로부터 신임을 잃어버렸다. 특히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는 우키타 히데이에를 총사령관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우키타 히데이에를 앞에 두고 서로 자신의 말이 맞다며 큰 소리로 연신 싸웠다. 이후 우키타 히데이에는 정유재란까지 참전했으나, 연이은 실책으로 구설수에 자주 오르내리게 된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으로 돌아간 우키타 히데이에는 종묘에서 만난 신병을 평생 원망했다. 종묘의 신병을 만나기 전까지 우키타 히데이에가 하는 모든 일은 승승장구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이자 사위로 일본군 총사령관에 오를 정도로 막강한 권력과 명예를 지니고 있었다. 부산에 상륙한 지 보름 만에 한성에 입성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전투에서의 공로도 올렸다. 그러나 종묘에서 신병을 만나고 나서는 좋은 일보다 안 좋은 일이 훨씬 더 많았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에도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하치조섬으로 유배되었다. 이곳에서 83세까지 50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었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 우키타 히데이에의 불운은 통쾌한 일이다. 우키타 히데이에가 아무리 어린 나이에 출정했다지만, 조선의 왕릉을 파헤치는 만행을 저질렀다. 특히 나라의 근간이라고 생각하는 종묘에 군영을 설치하고 효를 중시하는 조선을 욕보였다. 무엇보다도 아무 잘못이 없는 백성을 죽이고 이 땅에서 내쫓았다. 그러니 어쩌면 조선을 건국한 태조부터 태종, 세종, 성종과 같은 성군들이 신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종묘에서 내쫓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 죽은 왕들이 이승의 일에 개입해서는 안 되는 만큼,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 모두를 내쫓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이 머무는 종묘만큼은 일본군에게 조금도 내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신병을 불러 일본군을 쫓아낸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못난 선조가 비록 백성을 버리고 도망갔어도, 선대 왕들은 절대로 나라와 백성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선조와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종묘에서 신병이 등장하여 일본군을 내쫓은 사건이 임진왜란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선왕들의 애민 정신을 보여주며 백성의 충성을 끌어내는 데 일조하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신병이 나타난 이후 전국 각지의 많은 백성이 조선을 지키기 위해 의병이 되어 일본군과 맞서 싸웠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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