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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Jun 14. 2022

개항부터 1890년대까지의 제물포 풍경


오페르트의 <금단의 나라 조선>


조선 후기에 수많은 이양선이 서해 연안에 등장했습니다. 1816년 영국의 베이질 호(Basil Hall) 함장은 서해안 일대를 탐사하고 대청군도를 해도에 표기하면서 자신의 부친 이름을 따 ‘Sir James Hall Island’라고 명명하기도 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 했던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금단의 나라 조선』에서 강화도의 모습을 삽화로 남겨놓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거센 파도처럼 몰려드는 서양 세력에 제물포가 개항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한 조선은 일본의 무관세무역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해관 설치를 서둘렀습니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 고문으로 조선을 방문하는 묄렌도르프가 1882년 12월 4일 제물포에 입항했습니다. 청이 보낸 묄렌도르프는 인천해관 총세무사가 되어 조선의 입장이 아닌 청과 서구 열강의 이권을 챙기는 정책을 펼쳐 많은 이들을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이 무렵인 1883년 12월에 방문한 미국 외교관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 1855~1916)은 『조선,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제물포는 바다와 육지의 특성을 모두 갖춘, 초가지붕이 즐비한 조그만 섬이다. 바다 쪽으로 경사진 언덕 위에 일본인 거류지와 유럽식 건물인 일본 영사관이 우뚝 솟아 있다. 크고 흰 이 건물은 먼바다로 향한 하나의 이정표처럼 태곳적 황량함을 지닌 제물포의 풍광을 희석시켜 준다.’라고 표현하며, 개항 직후 제물포에 서구식 건축물 등 여러 문물이 들어왔지만, 아직은 조선에 융화되지 못했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서구 문물이 들어오는 입구였던 제물포는 매우 빠른 속도로 변해갔습니다. 1887년 방문한 미국인 샤이에 롱(Chaille-Long, 1842~1917)은 ‘지금 제물포는 조선의 중요항구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개항의 조약들이 체결되던 1882년만 해도 그곳은 인천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하나의 작은 마을일 뿐이었다. 그러나 10명에 불과한 유럽인들을 제치고 우후죽순처럼 몰려들고 있는 중국과 일본 상인들은 몇 년 새 그 작은 마을의 면모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제대로 시설을 갖춘 호텔만 해도 두 개씩이나 버젓이 들어서 있는데, 하나는 중국인이, 다른 하나는 다이부츠라는 일본인에 의해 운영되었다.’라고 기술하였습니다. 중국과 일본인들로 인해 한적한 어촌이던 제물포에 많은 외국인이 호텔에 머무를 정도로 빠르게 변화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사벨라 비숍이 촬영한 제물포


1890년대에는 제물포에 일본인 거류지가 만들어지면서 미쓰비시와 일본제일국책은행 등 두 개 은행이 운영될 정도로 일본의 색채가 더욱 진해졌습니다. 일본인들은 제물포 포구를 자신들의 발음으로 진센(jinsen)으로 부르며 조선을 개화시켰다는 우월 의식을 가졌습니다. 마이니치신문 특파원 기자였던 사쿠라이 군노스케는 『조선시사』에서 ‘조선에 여행 온 사람이 이곳에만 머문다면 자신이 해외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다. 공동묘지에는 갑신정변 때 중국인과 조선인에게 참살당한 육군 대위 이소바야시 신조 묘비가 있다. 지나는 사람은 누구나 향을 피우고 꽃을 바쳐 영혼을 위로한다.’라며 청일전쟁에서 승리 직후 제물포를 자신들의 식민지로 인식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영국 여성 여행가였던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 Bishop, 1831~1904)은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에서 ‘일본인 거주지가 서울로 가는 큰길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으며 한국인의 마을은 그 바깥에 위치한다. 영국 교회가 서 있는 언덕 아래로부터 그 언덕을 타고 오르며, 더러운 샛길을 거쳐 닿을 수 있는 모든 암층 위에 한국인들의 토막이 꽉 들어차 있다. 주요 도로에서는 아버지들의 무기력을 본뜨고 있는 때 묻은 아이들의 조용한 모습을 볼 수 있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1890년대의 제물포는 일본 영향력 아래에 있었습니다. 이처럼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교두보가 제물포였습니다. 그 시작이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막대한 배상금을 강요하여 조선을 경제적으로 예속화하려는 제물포 조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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