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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Jun 21. 2022

과전법의 붕괴는 어떤 변화를 가져왔나?

조선 중기까지 우리나라는 관리들에게 수조권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복무의 대가를 지급하였다. 수조권이란 백성들이 국가에 내야 할 세금을 관리가 징수하여 가져가는 제도였다. 고려 시대 전시과가 전국의 토지를 대상으로 세금 징수권을 관리들에게 부여했던 것과는 달리 고려 말에 시행된 과전법은 경기도로 국한하였다.      

과전법은 고려 말에 시행되었지만, 실제로는 조선의 토지 정책이었다. 조선을 개국하기 위한 사전작업으로 건국에 참여한 전·현직 관리에게 수조권을 지급하고, 반대하는 사람의 재산은 몰수하는 과정을 통해 여말 세력 교체를 꾀한 정책이었다. 이로써 권문세족의 사전이 줄어들고 국가가 소유하는 공전은 늘어났다. 백성들도 여러 명의 전주(수조권을 가진 사람)에게 내던 세금을 한 사람에게만 납부하면서 삶에 여유가 생겼다.    


전시과 체제에선 수조권이 반납되지 않아 폐해가 발생했었기에, 과전법은 관리가 사망하면 무조건 반납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과전법도 수신전(죽은 관료의 아내에게 지급하는 토지)· 휼양전(죽은 관료의 자식들에게 지급하는 토지)·공신전을 이용해 자손에게 물려주는 편법이 남발하였다. 여기에 개국공신과 정변공신에게 나누어 주는 공신전은 별도로 세습이 가능하였다. 결국 수조권을 지급하는 지역을 경기도에 한정시켜 놓은 과 전법은 세습되는 토지가 계속 늘어나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세조는 관리에게 나누어 줄 토지가 부족해지자, 1466년 수신전과 휼양전을 폐지하고 현직 관리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는 직전법을 시행하였다.   

   

하지만 과전법의 폐단은 사라지지 않았다. 관료들은 농민들에게 수확량의 1/10을 징수하고, 여기에서 1/15을 국가에 납부하는 원칙을 잘 지키지 않았다. 현직에 있을 때 더 많은 재물을 축적하기 위해 불법적으로 더 많은 양을 농민에게서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농민을 강제 동원하여 개간한 토지를 불법 점유하거나, 권력을 이용하여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았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토지를 노비에게 경작시키거나, 땅을 소유하지 못한 농민에게 경작시킨 뒤 수확량의 절반을 가져가 는 병작반수제를 경영하였다.      

수탈을 견디지 못하고 농토를 떠나 유랑하는 농민들이 많아지자 성종은 관수관급제를 시행하였다. 농민이 관청에 직접 조세를 내면 국가가 관료들에게 급료를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관수관급제도 원칙에 맞게 운영되지 않았다. 국가에서 관리들의 수조권을 제약할수록 관료들은 사적 소유를 넓혀 손해를 메우려는 움직임으로 대응하였다. 결국 명종에 이르러 수조권을 부여하는 방식이 사라지고 국가에서 녹봉만을 지급하였다. 양반 관료들이 더는 수조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자, 권력을 이용한 불법 행위로 농민의 땅을 빼앗기 시작하였다. 자영농이 줄어들자 국가는 정해진 조세보다 더 많은 세금을 백성들에게 강제적으로 걷어 들였다. 세금을 견디지 못하고 땅을 떠나 도망치는 백성들이 늘어날수록, 군역의 감소로 국방력은 약해졌다. 명종 대에 임꺽정과 같은 도적들이 들끓고, 임진왜란 당시 군인이 없어 고전을 면치 못했던 배경에는 토지 붕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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