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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Jun 28. 2022

무엇이 6·25전쟁을 일으켰는가?

1950년 발발한 6·25 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오늘 날에도 그 아픔을 극복하지 못한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힘들어하고 있다. 6·25전쟁의 발발은 수많은 원인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지만,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미·소가 세계의 패권을 두고 벌인 전쟁이라는 점이다. 더불어 미·소가 직접 맞붙지 않고 약소국을 내세워 누가 강한지 대결한 대리전이었다. 


1945년 일제의 패망이 확실해지자 미국과 소련은 세계의 주도권을 독점하기 위해 자유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세계 여러 국가를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동아시아도 이런 냉전 체제에서 비껴갈 수 없었다. 소련은 신해혁명 이후 몽골의 독립을 지원하였다. 1921년 몽골이 공산주의 국가로 독립하면서 소련의 팽창 정책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특히 소련은 연해주를 기반으로 우리와 중국의 항일운동에 많은 지원을 해왔기에 동북아시아의 공산화에 큰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반면 미국은 동아시아에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미군을 주둔시킬 영토가 없어 한국·중국·일 본 3개국에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중국에는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에 맞서는 장제스의 국민정부에 엄청난 물자 지원을 하였다. 일본에는 연합군 최고사령부를 설치하고 아시아 진출의 교두보로 삼기 위해, 일왕을 처벌하지 않는 동시에 상징적인 존재로 인정하는 신헌법(평화헌법)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전범자 처벌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일본 전범들을 아시아를 경영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 활용하였다. 


한국은 신탁 통치를 통해 미국의 세력권에 넣으려 했으나, 소련과 북한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결국 한국 문제를 유엔에 이관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는 데 일조했지만, 분단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놓았다. 이후 동아시아의 정세를 관망하던 미국은 1950년 1월 국무장관 애치슨이 태평양 방위선을 알래스카-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경계로 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발표가 이루어진 배경에는 중국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정부의 부정부패와 무능력한 국정 운영이 있었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이 국민정부를 타이완으로 내몰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면서, 동북아시아 대부분의 국가가 공산화되자 대한민국에 대한 미국의 재논의가 이루어졌다. 미국 입장에서 가난하고 문맹률이 높은 대한민국은 이익보다는 재건에 투입되어야 할 비용이 더 많이 드는 불필요한 나라였다. 또한 이 무렵 소련이 핵무기를 완성하자, 소련과의 직접적인 마찰이 더욱 부담스러워졌다. 결국 미국은 대한민국을 버리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고 생각했고, 애치슨 선언 이후 한국에 주둔한 미군을 모두 철수시켰다. 


북한의 김일성과 박헌영은 이 순간이 적화통일의 적기라고 생각하고, 1950년 4월과 5월 소련과 중국을 연달아 방문하여 남침에 대한 허락과 지원을 약속받았다. 중국은 항일투쟁과 국공내전에서 큰 활약을 펼쳤던 독립군을 북한에 돌려주었고, 소련은 탱크를 비롯한 군사 무기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었다. 막강한 전투력을 가진 군대에 탱크와 같은 우수한 화력이 뒷받침된 북한 인민군에게 남한의 군대는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6·25전쟁에서 북한에 고전하던 남한은 다행히 유엔군의 도움으로 북한과 중국군으로부터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 후유증은 실로 어마하게 컸다. 남북한 합쳐 오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고 다쳤으며 실종되었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경제기반도 무너지면서 경제적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힘든 생활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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