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정호 Jun 07. 2022

고려의 여성은 어떻게 당당했을까

고려 시대의 여성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권리를 가지고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여성의 권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 당시 전 세계적으로도 고려 시대만큼 여성의 인권이 보장된 곳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고 보급되면서 남존여비(남자는 귀하고, 여성은 비천하다.) 사상이 사람들의 인식에 뿌리를 내리면서 여성들의 권위는 사라지게 되었다. “옛날에는 여자들이 이렇게 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어.”라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고려 시대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말이었다.     


고려 시대 일부일처제와 관련하여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몽골과의 오랜 전쟁으로 수많은 남자가 전쟁터에서 죽자, 결혼하지 못하는 여성과 과부들이 늘어났다. 많은 미망인과 고아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하고 곤란을 겪자, 충렬왕 때 대부경으로 있던 박유가 일부다처제를 주장하였다. 박유는 계급별로 차등을 두어 일부다처제를 시행하면 공녀의 숫자도 줄일 수 있고 인구도 늘릴 수 있다고 하였다. 당시 왕과 많은 관료는 박유의 말에 마음속으로 동의했지만 누구도 용기 있게 정책을 실행하자고 말하지 못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연등회가 열리던 날 박유가 지나가자 많은 여인이 “부인을 여럿 두자는 요망한 늙은이가 저놈이다.”라고 하며 돌을 집어 던지며 몰매를 때려 거의 반죽음이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고려 시대는 여성들이 자기 생각을 표출하는 집단의 목소리를 낼 수 있던 사회였다.      

여성들이 자신들을 위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사회적 제도와 경제적 뒷받침이 있었다. 고려의 경우 여성도 집안의 권리를 행사하는 호주(戶主)가 될 수 있었다. 호적에도 아들과 딸을 구분하지 않고 나이에 따라 기록을 하는 등 조선 시대와는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음서제의 경우 친자식이 아니더라도 사위와 외손주에게 관직을 물려줄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고려 시대에는 관직을 물려받기 위해 사위가 처가의 호적에 오르거나 처가살이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려 후기 뛰어난 성리학자로 알려진 이색의 경우도 권중달의 딸과 결혼한 뒤 처가살이를 오래 하였다. 이색의 문집을 살펴보면 처가의 제사나 혼인식, 장례식에 참석했던 내용이 친가보다 더 많이 기록되어 있다. 여성의 권위가 낮아지는 데 일조했던 성리학을 공부한 이색도 처가살이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기록을 남긴 것을 보면 처가살이는 고려 시대의 보편적인 현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결혼을 한 여성이 데리고 온 노비의 소유권은 남편에게 넘어가지 않았다. 부인이 이혼하거나 재혼을 하는 경우 자신이 데리고 온 노비를 되찾아 갔으며, 후손이 없는 경우에 노비는 친정으로 귀속되었다. 또한 여성들은 결혼 여부와는 상관없이 아들과 동등하게 재산을 물려받았다.      


이는 거기에 따른 의무도 부여되는 것이어서, 여자도 부모의 제사를 지냈다. 양가 부모의 제사가 겹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재산을 동등하게 상속하다 보니 자식들이 매년 돌아가면서 부모의 제사를 지내게 되면 시댁과 친정의 제사가 겹칠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부모의 혼령이 모든 자식의 집에 들러 안부를 살피고 극진한 대접을 받았으니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려 시대 여성의 권위와 삶이 오늘날과 비슷한 것은 아니다. 고려 시대는 현재와는 달리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다. 단지 조선 시대보다 여성의 권위가 높고 처우가 좋았을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동북 9성 반환이 왜 이리 아쉬울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