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악산은 경기도 양주와 연천, 그리고 파주에 걸쳐있는 해발고도 675m의 높지 않은 산이다. 그러나 삼국시대부터 감악산은 한반도의 서북지역과 중부지역을 연결하는 중요 통로였으며, 대표적인 영산(靈山)으로 알려졌다. 많은 사람이 감악산 산신의 존재를 믿으며 매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제를 올렸다.
감악산이 국가 주도로 제사를 지내는 대상이 된 것은 신라시대부터였다. 신라는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내며 국가의 안녕과 발전을 빌었는데, 7~8세기 무렵 소사(小祀)에 감악산이 포함되었다. 한반도의 동남쪽에 수도를 둔 신라가 멀리 있는 감악산에서 제사를 올린 이유는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진흥왕이 한강 하류를 장악한 이후 감악산 인근은 고구려군과 잦은 전쟁을 치르던 장소였다. 만약 감악산이 고구려군에게 함락되면, 한강 유역을 지키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도 감 악산 일대는 신라를 정복하려는 당나라에 맞서 전투를 벌이던 장소로, 신라의 존망 여부가 결정될 수 있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잃은 신라군의 영령을 위로하고, 감악산 산신이 신라의 승리를 도와준다고 믿게 만드는 제사는 자칫 돌아설 수 있는 감악산 인근 지역의 민심을 잡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통일신라시대에 감악산의 산신으로 당나라 장수 설인귀(613~683)가 지목되었다는 점이다. 설인귀는 당 태종과 고종 시기에 활약했던 중국 장수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돌궐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면서 중국인들의 영웅이 된 인물이다. 중국인들이 설인귀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설인귀를 주인공으로 다룬 《설인귀정동》 《설정산정서》 등의 작품은 시대가 바뀌어도 늘 사랑받았다. 심지어 설인귀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도 18세기 이후 《설인귀전》으로 번역되어 많은 이들이 읽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설인귀는 한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신라와 전쟁을 치른 적대적 인물이다. 그런데도 설인귀를 감악산 산 신으로 모신 이유는 무엇일까?
감악산이 위치한 지역은 신라가 차지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고구려의 영토였다. 그 결과 감악산 일대는 당과 신라에 대항한 고구려 부흥 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특히 임진강 건너 호로고루에 서는 신라와 당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통일신라 말에 궁예와 왕건이 감악산에서 멀지 않은 철원과 개성을 도읍으로 정하고 나라를 세운 것도 신라에 대한 이 지역의 반감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반면 신라는 늘 감악산 일대의 민심을 다독이고 억누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당나라 군대 2만 명을 평양 안동도 호부에 주둔시켜 고구려인을 죽이고 억압하던 설인귀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통일신라는 엄청난 괴력으로 고구려인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설인귀의 위명을 이용하여 고구려 유민을 진압했다. 그 결과 이 지역 백성들이 발해로 이탈하는 것을 막는 효과를 보았다.
고려시대에도 감악산 산신 설인귀에게 국가 주도로 제사를 지냈던 기록이 《고려사》에 나와있다. ‘현종 2년(1011년) 2월 거란군이 장단에 침입하자 때마침 바람과 구름이 세차게 일어 감악산 신사에 군기와 군마가 있는 것처럼 보이니 거란군이 두려워하며 더 이 상 진군하지 못하였다. 이에 해당 부서로 하여금 제사를 거행하게 하였다.’라고 적혀있는 《고려사》의 내용에서 설인귀가 거란군을 내쫓는 신기하고 기이한 능력을 보여주었고, 고려왕은 보답의 의미로 설인귀에게 감사의 제사를 지낸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중국 장수로서 고구려와 통일신라를 괴롭히던 설인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점이다. 고려 초의 설인귀는 더이상 고구려를 무너뜨린 당나라 장수가 아니었다. 설인귀는 감악산이 있는 파주 적성 출신으로 중국 당나라에 가서 출세한 뒤, 고향과 고국을 못 잊어 감악산의 산신이 되었다는 전설이 기정사실화되었다. 백성들은 설인귀가 이민족의 장수가 아닌 우리 선조로서 고려의 생존을 위협하는 거란군을 신비 한 능력으로 내쫓고 왕과 나라를 수호했다고 믿었다.
이후 설인귀는 지역사회를 수호하는 역할을 넘어 왕실과 국가를 지키는 막강한 신으로 승격되었다. 거란이 물러난 이후에는 사람들이 설인귀에게 가족을 만들어주었다. 고려 조정은 설인귀 부부와 두 아들 부부, 총 6명을 산신의 대열에 올렸다. 이들에게 봄· 가을로 제사 올리는 것을 잊지 않았고, 국난이 생기면 감악산을 수시로 찾아가 도와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충렬왕 13년(1287년) 원나라 황제를 돕기 위해 모반을 일으킨 내안(?~1287)을 토벌하기 직전, 고려 조정이 설인귀의 둘째 아들을 도만호(치안 담당 장관직)에 책봉했다는 《고려사》 내용을 통해서도 감악산 산신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고려 조정이 나라의 운명을 기댈 정도로 설인귀를 높이 평가하자, 백성들은 더욱더 감악산 산신의 존재를 믿었다. 감악산 산신이 영험한 능력으로 자신들을 영구히 보호해 주기를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