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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Sep 27. 2022

교육자이자 권투선수였던 저항시인 이상화 1/2

4형제 모두 이름을 남긴 이상화 집안

일제강점기 민족의식을 담은 시를 쓰고, 3·1운동 등 여러 독립운동을 펼치면서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였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그리고 교육자였던 이상화는 대구에서 1901년 태어났다. 아버지 이시우는 대구에서도 알아주는 큰 부호이면서 선각자로 많은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상화가 7살 때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큰아버지 이일우 덕분에 이상화를 비롯한 4형제는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아니 올바르게 성장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4형제 모두 대한민국의 독립과 발전에 있어 큰 기여를 했다.


첫째였던 이상정(1897~1947)은 시·서·화 모두 능통하여 「표박기」란 제목의 유고를 남긴 시인이자, 192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던 독립운동가였다. 이상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도 대표이자, 태평양전쟁 이후 중국 육군 중장으로 북지나방면 일본군 무장해제를 담당하였다. 또한 이상정의 부인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남경 국민정부 항공서 비행사이자 의열단 여자부 연락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권기옥이었다. 셋째 이상백(1903~1966)은 광복 이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한국사회학회장 등을 역임하며 체육과 사회 발전에 이바지했으며, 넷째 이상오(1905~1969)는 한국을 대표하는 수렵인으로 「한국야생동물기」와 <수렵야화>를 신문에 연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음에도 이들 4형제 모두가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각 분야의 정점에 섰다는 점이 매우 놀랍다. 그러나 우리가 눈여겨봐야 하는 것이 4형제 모두가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했다는 점이다. 이들 4형제는 나라를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았고, 이들 형제의 우국충정을 가장 잘 대변하는 인물이 이상화이다.


이상화의 대표작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중략>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1926년 6월 《개벽》 70호에 발표된 작품     

이상화를 대표하는 문학작품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거부하면서 나라의 독립을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고 메시지가 담겨있다. 비참한 식민지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독립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깊이 고민하는 이상화의 마음에 시를 읽는 사람들은 먹먹함과 동시에 가슴 한쪽이 아파져 온다. 어린 학생들까지도 이상화가 시를 통해 어떤 말을 전하고 싶어 하는지를 어렵지 않게 느낄 정도로 이상화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이상화는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일제의 탄압을 이토록 강하게 거부하며 독립된 나라를 희망하는 시를 썼을까?


민족정신을 함양하게 되는 청소년기 

    이상화는 14살 때까지 큰아버지가 세운 우현서루에서 한학을 배우며 성장했다. 하지만 한학만으로는 빠르게 변화되는 현실에서 살아가기 어렵다고 생각한 이상화는 1년 동안 초등학교 과정을 익힌 뒤, 서울 경성 중앙학교에 입학했다. 늦은 나이에 신학문을 배웠음에도 정규 교육과정을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은 이상화의 능력과 재능 그리고 노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3년간의 학교생활을 마치고 졸업한 이상화는 금강산 일대를 여행했다. 여행 기간 이상화는 나라를 빼앗긴 현실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깊이 고심했다.

그러나 시대는 이상화에게 긴 시간을 주지 않았다.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한 직접적인 행동을 요구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상화는 백기만, 허범 등과 선전문을 시민에게 배포하며 대구에서의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일본 경찰이 이상화의 활동을 눈치채고 체포하려 했으나, 다행히도 서울로 피신하면서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해 10월 서순애와 혼인을 올렸다. 이상화가 서울로 피신하고 혼인한 이유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큰형 이상정을 보호하는 한편, 둘째로서 형을 대신해 집안을 관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나라를 되찾는 일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 다음 주 2부가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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