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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Oct 04. 2022

교육자이자 권투선수였던 저항시인 이상화 2/2

일제 만행에 저항하다.

이상화는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글로 독립운동을 펼치기로 마음먹고, 일본 도쿄에 있는 외국어 전문학교인 ‘아테네 프랑세’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이상화는 《백조》 동인이 되어 <나의 침실로>, <단조> 등 여러 시를 발표했다. 《백조》가 일제의 검열을 피하고자 박종화, 나도향 등이 아펜젤러 등 외국인을 편집인으로 둔 만큼, 이상화는 일제로 인한 한국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면서 독립을 희망하는 작품을 쓸 수 있었다.

이상화 가족, 맨뒤 용희, 앞줄 왼쪽 충희 태희 부인 서순애, 처제

하지만 이상화의 일본 유학생할은 오래가지 못했다. 1923년 발생한 관동대지진으로 일본인들이 자경단을 꾸려 한국인을 무참하게 학살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직접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프랑스 유학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상화는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 있는 취운정에서 울분과 희망이 뒤섞인 시를 썼다. 이와 함께 김기진과 무산계급 문예운동단체 <파스쿨라>를 결성했다. 1925년에는 이를 더욱 발전시킨 KAPF(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의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이 무렵 사회주의가 독립운동의 한 방향으로 유입되고 있는 만큼 이상화는 KAPF를 통해 독립과 함께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발표된 작품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다. 이 작품이 발표되던 해에 장남 용희가 태어난 만큼 이상화는 독립에 대한 희망을 더욱 깊이 담았다.     



일본 경찰의 구금과 탄압

일본 경찰은 이상화의 활동에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주의 깊게 감시했다. 그러던 중 1928년 6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노차용, 장원택 등이 대구 달성군 부호를 권총으로 협박한 사건이 터졌다. 이를 기회로 삼은 일본 경찰은 신간회 대구지회 출판 간사직을 맡고 있던 이상화를 관련자로 구금해버렸다. 이 사건을 ‘ㄱ당 사건’이라 부른다. 


일제가 이상화를 주요 사찰대상자로 분류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이 1936년에도 일어났다. 여행을 빌미로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큰형 이상정을 만나고 돌아온 이상화를 일본 경찰은 아무 혐의도 밝히지 않고 20여 일간 가두고 고문을 가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1939년에는 교남학교 교가의 가사를 문제 삼아, 이상화의 집을 무단 수색하여 그동안 집필했던 원고와 고월 이장희의 유고를 압수했다.

여기에는 이상화가 교남학교(현재 대륜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일제 정책을 따르지 않고 학생에게 민족정신을 길러준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일본 경찰의 인식이 밑바탕에 깔려있었다. 1933년부터 이상화는 교남학교에서 영어와 작문을 무보수로 가르치면서도 틈틈이 시간을 내어 일본 유학 시절 배운 경험을 바탕으로 권투부를 만들었다. 대구복싱의 첫 시작이기도 한 교남학교 복싱부를 찾아온 학생에게 이상화는 ‘침략당한 민족이 주먹이라도 강해야 하지 않겠느냐.’라며 열심히 지도한 결과 아마추어 권투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도 하였다. 이런 이상화의 노력에 힘입어 교남학교는 일제 경축일에 거짓으로 행사를 진행하고,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는 등 민족학교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이상화를 잊지 않으려는 시민들의 노력

안타깝게도 이상화는 어린 학생들이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1943년 4월 25일, 위암 선고를 받은 지 한 달 만에 젊은 나이로 숨지고 말았다. 그래도 하늘은 이상화의 죽음에 무심하지 않았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늘 가슴 아파하며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조그마한 일도 마다하지 않던 이상화를 기억하는 이들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1948년 이상화 친구였던 백기만은 이상화가 생전에 썼던 16편의 시를 수록한 『상화와 고월』시집을 출간했다. 1977년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무엇보다 2001년 도로 계획에 따라 이상화 고택이 사라진다는 소식에 5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이상화 고택을 지키자는 서명 운동에 동참했다. 성금도 무려 8,600만 원이 모였다. 군인공제회가 이상화 고택을 매입에 2005년 대구시에 기부했고, 이상화 고택보존운동본부는 시집과 모인 성금을 대구시에 기증했다. 이에 대구시도 이상화 고택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여 2008년부터 시민에게 개방하고 있다. 그 결과 이상화 고택을 중심으로 서상돈 고택과 3·1운동 계단 등 인근지역은 대구를 대표하는 명소이자, 우리 선조들의 독립운동 정신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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