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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Oct 12. 2022

의상대사와 화엄사

화엄사는 인도 승려 연기가 544년(백제 성왕 22년)에 창건해 법왕 때는 3천여 명의 승려가 거주할 정도로 매우 큰 사찰이었다. 645년(선덕여왕 14년)에는 신라의 승려 자장율사가 부처님의 진신(부처의 진실한 몸) 사리를 화엄사에 모시고, 4사자 3층 석탑을 세우며 중수했다고 한다. 그런데 선덕여왕 시절은 백제와 치열한 전쟁을 치르며 양국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던 때였는데, 신라 승려가 백제 지역에 사찰을 중수했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이를 두고 학계에서도 사실 여부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었다.     

또한 의상대사가 장륙전(현재 각황전)을 세우면서 화엄경을 벽에 새겼다고 하는데, 화엄경 역시 797년(원성왕 13년)이 되어야 번역되었기에 화엄사에 대해 여러 의혹의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지 못하던 문제를 해결해준 것이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 발문이었다. 발문에서 경덕왕 시절 황룡사 승려였던 연기가 화엄경사경을 완성했다고 밝히면서 화엄사의 창건이 500년대가 아닌 700년대로 밀려나게 되었다. 또한 원효, 의상, 자장대사와 관련된 이야기도 후대에 만들어진 창작물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과 다른 전설이라도 그 속에는 숨겨진 역사적 사실과 당대 사람들의 가치관이 담겨 있다. 전설과 설화에는 후대 사람들의 생각과 염원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화엄사는 이름에서부터 화엄종과 깊은 연관을 가진 사찰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화엄종은 불교 종파에서도 왕과 지배층이 갖고 있는 권력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준다. 화엄종의 가장 큰 핵심은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로 ‘하나인 것이 모두요, 모두가 하나다.’로 해석된다. 이 사상을 왕과 지배계층의 입장에서 풀이해보면 ‘왕이 곧 국가요, 국가는 왕이 있어야 존재한다.’라는 논리가 된다.      


신라왕이 스스로 전륜성왕으로 자처하며 불국토를 만들어 부처님의 뜻을 펼치겠다는 말을 가장 잘 뒷받침해준 것이 화엄종이었다. 왕이 곧 국가이며 부처님의 뜻을 펼치는 존재로 규정한 화엄종은 백성들에게 왕이 꼭 필요한 존재라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이 덕분에 신라는 화엄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육성했다. 그런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600년대 중반에는 우리가 아주 잘 아는 큰 스님들이 나오게 된다. 바로 자장대사, 원효대사, 의상대사다. 이들은 모두 화엄종의 대가였는데, 자장대사는 문헌상으로 보면 636년 당나라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만나 화엄의 진리를 깨닫고 신라에 들어와 ‘화엄경’을 처음으로 강설했다고 한다. 원효대사도 화엄 사상을 크게 이해하고 『화엄경종요』와 『화엄경소』를 저술해 가르침을 남겼다.      


그러나 화엄종 하면 우리는 해동화엄종을 개창한 의상대사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661년 중국 당나라에 유학 간 의상대사는 중국 화엄종의 제2조였던 지엄에게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을 얻은 뒤 671년 신라로 귀국했다. 귀국한 의상대사는 낙산사에서 관세음보살을 만난 뒤 부석사를 세워 화엄 사상을 신라에 널리 펼치고자 했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도 큰스님으로 모셔져 존경을 받고 있다. 의상대사가 저술한 책은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의상대사가 만든 <화엄일승법계도>는 화엄 사상의 정수로 일컬어지고 있다.     

자장, 원효, 의상대사의 큰 공통점은 중국의 불교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우리의 정서와 문화를 반영한 한국 불교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이야기가 국보로 지정된 화엄사 각황전에 내려온다. 『삼국유사』를 보면, 의상대사는 중국 화엄종을 계승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당나라 고종이 신라를 침략한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자 귀국을 결심하고 신라로 돌아왔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의상대사가 개창한 화엄종이 호국불교의 성격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후 의상대사는 신라 왕실의 지원을 받으며 많은 사찰을 세우고 화엄종의 진리를 강연하러 다녔다. 의상대사는 당나라로 유학길을 떠났던 원효대사에게도 자신이 깨달은 바를 알려주려 했으나, 원효대사는 이미 화엄 사상을 꿰뚫고 통달해 있었다.      


중국에서 화엄 사상을 배워 신라에서 최고라 생각하던 의상대사는 너무 놀라며 원효대사에게 어찌 화엄 사상에 대해 이리 잘 아느냐고 물었다. 이에 원효대사는 이미 130여 년 전에 인도의 연기조사가 지리산 밑에 화엄사를 세워 삼한에 부처님의 뜻을 가르치고 있었노라 답했다. 이어 자신은 중국의 화엄 사상이 아닌 인도의 화엄 사상을 직접 배워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하며, 삼한을 위해서는 의상대사도 천축국의 화엄 사상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가르쳤다.      

이에 의상대사는 한동안 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직접 화엄사로 가서 자신이 익히고 깨달은 것과 천축국의 화엄 사상을 비교해보겠다고 달려갔다. 의상대사는 화엄사에서 중국에 뒤처지지 않으면서도 자주적인 성격을 가진 우리의 화엄 사상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신라만의 화엄종을 만들겠다는 굳은 다짐을 했다. 그 다짐의 표현으로 화엄사에 3층의 장육전을 세워 황금장육불상을 모셨다. 장육이란 부처님의 몸을 의미하는 것으로, 부처님의 진리를 담은 화엄경을 돌에 새기면서 화엄사를 해동 화엄종의 시작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그리고 신라가 해동화엄종의 시작이며 불국토임을 보여주기 위해 화엄 사상을 근본으로 하는 사찰을 전 국토에 많이 세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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