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눌대사(1158~1210)는 고려시대 황해도 서흥에서 몸이 약한 아이로 태어났다. 지눌대사의 아버지는 곧 죽을 것만 같은 아이를 살리기 위해 부처님이 계신 사찰을 찾아갔다. 지눌대사의 아버지는 부처님을 향해 연신 절을 올리며 아이만 건강하게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부처님에게 아이를 바치겠다고 마음속으로 약속했다. 부처님의 도움 덕분이었을까? 생사를 장담할 수 없던 어린 지눌이 건강해지자, 아버지는 강원도 강릉시 굴산사(신라 말에 범일이 개창한 사찰)에 어린 지눌을 출가시켰다. 이곳에서 지눌대사는 종휘를 스승으로 두고 불경에 대한 공부와 참선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결과 24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승과(僧科)에 급제할 수 있었다.
지눌대사는 개인의 영달을 이룰 수 있는 승과에 급제했지만, 마음은 돌이 내려앉은 듯 무거웠다. 당시는 무신정변이 일어나 많은 무인들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면서 나라와 백성을 돌보지 않던 시기였다. 끊임없는 정권 교체로 고려 사회는 불안정했고 경제는 파탄 나고 있었다. 차마 죽지 못하고 근근이 살아가는 백성들이 대다수였다. 그런데 일부 승려들은 어디에도 기댈 곳 없이 힘들어하는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돌봐주기는커녕 오히려 사채놀이와 노비를 이용한 수공업으로 막대한 부를 올리는 세속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교종과 선종으로 나누어져 자신들의 믿음만이 옳다고 싸우고 있었다.
지눌대사는 우선 불교계의 타락을 심각하게 우려하며 정화운동을 펼칠 것을 주장했다. 우선 불교계의 쇄신을 위해 교(敎, 교리)와 선(禪, 마음을 한곳에 모아 생각하는 것)의 본질이 다르지 않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불교계가 나서서 사회의 혼란과 부조리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눌은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승려들을 모아서 신앙결사단체인 정혜사(定慧社)를 만들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지었다. 그리고 행동으로 옮겼다. 신앙결사의 이름은 나중에 수선사(修禪社)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지눌대사와 같은 뜻을 가지고 모인 승려들조차 기존의 틀과 악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자, 지눌은 송광사로 들어와 새롭게 신앙결사운동을 시작했다.
원래 송광사는 신라 말 체징이 세운 길상사라는 조그만 사찰로, 고려 인종 이후 폐허가 되어 있었다. 지눌이 길상사를 개혁의 터로 잡은 이유가 최고의 스승으로 여기던 육조혜능의 머리가 모셔진 쌍계사와 멀지 않았고, 굳은 절개와 의지를 상징하는 소나무가 많은 송광산이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기에 최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여기에 폐허가 된 길상사가 복원되는 과정처럼 불교계가 쇄신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지눌은 길상사를 복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소나무가 많아 송광산이라 불리던 산의 이름도 혜능의 조계 보림사에서 이름을 가져와 조계산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처럼 지눌대사는 산의 이름과 사찰의 이름을 완전히 바꾸면서 불교계의 쇄신 의지를 강력히 표출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눌대사는 선종과 교종을 통합한 조계종을 개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