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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Oct 25. 2022

도두봉으로 보는 제주역사

도두봉 오름은 섬의 머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작은 오름이 제주도의 머리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지게 된 데는 탐라국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탐라국은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제주도를 통치하던 소국이었다. 그리고 제주도를 오랫동안 통치했던 탐라국의 수도가 도두봉 오름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도두동(오늘날 행정구역 명칭)이다.     


백제와 신라라는 강대국으로부터 탐라국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탐라국은 내륙으로 사절단을 자주 보내야 했다. 하지만 당시의 조선술(배를 만드는 기술)과 항해술로 제주의 거친 바다를 헤치고 내륙으로 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탐라국 사절단이 바다를 향해 출발하면 탐라국의 많은 사람들이 도두봉에 올라 사절단의 안전한 귀가를 기원했다. 사절단이 탐라국 수도로 돌아올 때는 제일 먼저 보이는 도두봉을 보며 고향에 돌아온 기쁨을 맞이했다. 나라의 운명을 위해 제주도를 떠나는 장소이자 도착지인 이곳을 제주도의 머리라는 뜻을 가진 도두봉이라고 부른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오늘날 도두봉 아래가 탐라국의 수도였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탐라국의 역사를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탐라국은 제주도의 설화와 깊은 관련이 있는 제주도 역사의 시작이기도 하다. 제주도 설화에 따르면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3명이 삼성혈에서 솟아났다고 한다. 3명은 벽랑국 세 공주와 결혼해 자손을 낳으며 제주도에 농경과 문명을 알려주면서 나라를 세웠다. 그 나라의 이름이 탐라국이다. 그러나 탐라국은 해상교통의 요지에 위치하면 서 늘 주변국들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 반면 벼농사를 짓기 어려운 화산섬인 제주도는 물자가 풍족하지 않았고, 육지와 거리가 멀어 대륙으로의 진출도 어려웠다. 그 결과 탐라국은 중앙집권화를 이루며 막강한 힘을 가지고 팽창하던 백제와 신라 외에도 당나라와 일본과 수교를 맺으며 나라의 안위를 보존해야 했다.     


수교를 맺었다고는 하지만 대등한 관계의 수교는 아니었다. 주변국에 비해 힘이 열세였던 탐라국은 신하의 예를 갖추며 관직을 받는 사대관계의 형식으로 나라의 안위를 보존할 수 있었다. 특히 탐라국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영향력이 컸던 백제에 조공을 바치며 좌평이라는 관등을 받았다는 기록에서 약소국이던 탐라국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백제의 보호 아래 탐라국은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으나, 백제가 멸망하자 탐라국은 곧바로 신라의 속국임을 자처하며 왕국을 지켜나갔다.     

통일신라시대는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해 직접 통치하지 않고, 기존의 지배세력을 끌어들여 간접 통치하는 체제였기에 탐라국은 멸망하지 않고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다. 통일신라가 멸망한 후에도 탐라국은 고려에 조공을 갖다 바치며 오랜 시간 나라를 지켜나갔다. 하지만 고려 중기부터 지방에 관리를 파견해 직접 통치하는 흐름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결국 고려 숙종 때 탐라국은 고려의 지방행정구역인 군(郡)으로 편입되어 왕국의 기능을 잃어버렸다. 이후 의종 때는 군(郡)에서 현(縣)으로 격하되고, 제주도와 관련된 행정업무를 중앙에서 파견된 현령이 담당케 하면서 탐라국 왕실은 제주도의 실질적인 통치력을 상실해버렸다. 마침내 1211년 고려 희종 때는 제주로 명칭이 바뀌면서 탐라국의 왕족들은 성주와 왕자라는 직위만 가지고 명맥을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다. 관리가 파견되지 않는 속현이 완전히 사라지는 조선시대에는 탐라 왕족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던 성주라는 명칭도 사라졌다. 탐라 왕족은 좌도지관·우도지관이라는 관직으로 불리며 중앙행정조직으로 완전히 편입되었다가, 세종 때는 왕족들 모두 평민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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