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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Jul 26. 2022

동방의 주자라 불리다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난 이황(1501~1570년)은 세상의 빛을 본 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숙부 이우에게 학문을 배우며 성장한 이황은 성균관에 입학해 많은 이의 기대를 받았다. 이황은 34세에 과거에 급제한 뒤,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 부정자를 시작으로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시강원의 문학 등 여러 관직을 거치며 자신이 가진 역량을 발휘했다.     


그러나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 당시 올바른 소리를 했다가 벼슬과 품계를 박탈당했다. 그럼에도 이황은 다시 홍문관 부응교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안동 토계 인근에 양진암을 짓고 학문에 전념했다. 이황의 성품과 학식을 존경하던 명종은 이황을 단양 군수로 임명했으나, 이황의 형 이해가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자리를 경상도 풍기군수로 옮겼다. 이황은 이곳에서 백운동 서원의 우수성을 확인하고, 조정으로부터 편액을 내려받는 동시에 국가의 지원을 받는 사액서원을 만들었다.     


이황은 형 이해가 1550년(명종 5년)에 유배지로 가던 도중 죽자, 벼슬에 뜻을 버리고 학문에 몰두했다. 조정은 이황을 중용하기 위해 그에게 계속 관직을 내렸지만, 이황은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명종은 이황을 어떡하든 자신의 옆에 두고 싶어 그에게 음식을 보내는 정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황이 뜻을 굽히지 않자, 명종은 이황이 머무는 도산의 풍경이 그려진 그림을 보며 그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이황은 평생 140여 회의 벼슬을 받았고, 그중 70여 회를 사임했다.     


고향에서 예안향약을 만들고 도산서당을 세워 후진을 양성하던 이황은 명종이 죽자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선조도 이황에게 자신 옆에서 국정을 도와달라고 부탁했으나, 이황은 병을 핑계로 물러나며 《무진봉사》와 《성학십도》를 바쳤다. 《무진봉사》는 왕이 주의해야 할 여섯 조항이며, 《성학십도》는 왕이 행해야 할 도를 담은 것으로, 이황이 평생 익힌 학문의 정수였다. 선조는 이황이 70세로 죽자 그를 영의정으로 추증했으며, 1610년(광해 2년)에 이황은 문묘에 배향되었다. 이황은 ‘동방의 주자’로 불렸으며 사단과 칠정을 각각 이의 발현과 기의 발현으로 구분하는 이기호발설을 주장했다. 이황의 제자로는 류성룡, 김성일, 이산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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