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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Aug 02. 2022

왕오천축국전에 담긴 가치는 얼마나 될까?

신라의 승려 혜초(704~787)가 쓴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우리나라보다도 세계의 다른 나라들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책이다. 《왕오천축국전》은 혜초가 인도의 5천축국(천축국은 중국이 부르는 인도 명칭)을 답사하고 쓴 여행기로 왕을 중심으로 기록하는 정사(正史)와는 내용과 서술 방식이 다르다. 여기에는 혜초가 바닷길로 인도를 방문했다가 육로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보고 들었던 각 나라의 풍속과 전통 같은 민중의 역사가 담겨있다. 또한 신라인의 눈으로 보고 적었기에 중국 중심으로 서술된 기존의 책에서는 볼 수 없었던 많은 역사적 사실이 밝혀졌고, 중화사상으로 왜곡된 사실도 바로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이 《왕오천축국전》 3권 중 1권만이 전해오는데, 그마저도 내용이 생략되었거나 빠진 부분이 많다.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3월 프랑스의 탐험가였던 펠리오(Pelliot,P.)가 중국 둔황의 천불동에서 발견하였다. 이 당시 펠리오는 중국과 중앙아시아에서 수집한 약 3,000권의 고사본과 약 3만 권의 한문 간본을 파리 국립도서관에 넘기고 있었다. 자칫하면 이 과정에서 《왕오천축국전》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다른 책들과 함께 서고(書庫)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다행히 1909년 중국학자였던 나진옥에 의해 중요성이 제기되면서 관심을 받았다. 이후 1915년 일본의 다카쿠스가 《왕오천축국전》의 저자가 신라 승려 혜초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왕오천축국전》이 온전하게 보관되어 있지 않음에도 가치가 높은 것은 8세기 동남아시아와 인도 그리고 중앙아시아의 음식, 의상, 기후, 생활상 등을 기록한 책이 현재까지 《왕오천축국전》 외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왕오천축국전》이 세계사적 가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의 역사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통일신라가 국제적이고 개방적인 나라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 조선 시대 쇄국정책으로 세계의 흐름과는 동떨어져 고립된 시간과 공간에 있었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여기에 일제가 한국은 일본 10세기경의 사회·경제 구조로 되어 있을 만큼 정체되고 낙후되었다는 식민 사관을 심어놓았다. 그 결과 국제사회의 주역으로 활동하던 우리의 역사는 한반도에 갇혀 폐쇄적인 생활만 한 것으로 왜곡되어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왕오천축국전》은 신라가 부강한 나라였으며 국제사회에서 당당한 주역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도까지의 여정은 국가적 차원에서 외교사절단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그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머나먼 여정이다. 그런데 혜초가 신라인이라고 밝히면서 20대의 젊은 나이로 4년 동안 2만 km가 넘는 거리를 다녀왔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경제적 여력이 뒷받침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국 승려 의정의 《구법고승전》은 인도로 유학을 떠난 60여 명의 승려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중 신라인이 9명이나 된다. 이는 신라가 중국과 인도로 많은 유학생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풍요로운 국가였고, 언어와 여행 관련된 타국의 다양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국제적인 나라였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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