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정호 Nov 01. 2022

왜 외규장각 의궤는 반환되지 못할까?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무렵 동아시아는 서구 세력의 침략으로 모든 것이 매우 급변하던 시기였습니다. 청나라가 영국·프랑스와 벌인 제2차 아편전쟁에서 패배하자, 러시아는 베이징 조약을 중재한 대가로 연해주를 할양받았습니다. 청나라를 가볍게 제압하는 서구 국가 중 하나인 러시아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불안해진 흥선대원군은 국내에 머무는 프랑스 선교사를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프랑스 선교사는 나폴레옹 3세에게 러시아를 견제하라는 흥선대원군의 말을 전달할 수 없다며 강한 거부 의사를 밝혔습니다. 정적들도 이틈을 타서 흥선대원군을 천주교 신자로 몰아붙였습니다. 안팎으로 정치적 위기를 맞은 흥선대원군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프랑스인 신부 9명과 수천 명의 사람을 죽이는 병인박해를 일으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살아남은 리델 선교사는 중국 톈진으로 도망가서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병인박해를 이용하여 통상수교를 맺어 공을 세우려는 로즈 제독은 1866년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강화도 인근과 한강 수로를 탐색을 마친 로즈제독은 군함 7척과 병사 1,520명을 이끌고 강화도 갑곶진을 침략했습니다. 이후 강화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초토화하던 프랑스군은 조선의 기록보관소인 외규장각도 습격했습니다. 당시 외규장각에는 왕실 물품 외에도 의궤 401종 667책 등 총 5,166점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외규장각

1782년(정조 6) 정조는 창덕궁 규장각에 보관하던 주요 물품과 도서를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강화도 행궁에 외규장각을 설치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정족산사고가 강화도에 있는데도 외규장각을 설치한 것은 강화도가 외침 시 임시수도로 활용될 만큼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자를 알지 못하는 프랑스군에게 5,000여 책에 달하는 서적은 아무 가치 없는 종이에 불과했습니다. 아무 죄의식 없이 외규장각 서적을 불태우던 프랑스군은 그림이 있는 의궤가 소장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흥미를 느꼈습니다. 이들은 전승품으로 의궤와 갑옷과 투구 등 조선을 보여줄 수 있는 물건을 군함에 실었습니다. 이때 프랑스 군함에 실린 의궤는 조선 왕실이 국가나 왕실의 중요한 의식이나 행사과정을 기록한 책입니다. 글과 그림으로 상세하게 기록한 만큼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의궤의 가치를 모르는 프랑스는 국립도서관 베르사유 분관 폐지 창고에 쌓아놓고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모리스 쿠랑(1865~1935)이 『한국서지』 제2권(1895)에서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외규장각 의궤 목록을 기록해놓았습니다. 만약 모리스 쿠랑이 기록이 없었다면 우리는 외규장각 의궤가 프랑스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약 100년 뒤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근무하던 박병선 박사는 중국 도서로 분류된 외규장각 의궤를 발견했습니다. 그녀는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의궤가 우리의 것이며, 그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너무도 기쁜 마음으로 1975년 의궤 목록을 발표했습니다. 그녀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의궤의 국내 반환을 위해 뛰어다녔습니다.

박병선(1923~2011)

한국에서 유학 비자를 받은 최초의 여성으로 프랑스국립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면서, 1377년 인쇄된 <직지심체요절>이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로 출판한 <42행 성서>보다 78년 앞섰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또한 외규장각 의궤의 존재를 발견하여 대한민국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인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동백장,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하였습니다.


1991년 역사적 가치가 높은 의궤를 찾아달라는 서울대학교의 요청을 접수한 정부는 프랑스에 반환신청 했습니다. 한동안 우리의 요구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프랑스는 고속철도 수주를 받아내려고 『휘경원원소도감의궤』 의궤 1권을 돌려주었습니다.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고속철도 수주가 이루어지면 모든 의궤를 반환하겠다고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우리 정부와 민간단체는 프랑스에 약속을 지키라며 소송을 진행했지만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프랑스가 의궤를 돌려주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자국이 보관하고 있는 수많은 다른 나라의 문화재 때문입니다. 프랑스국립박물관에 보관된 유물 대부분은 프랑스가 식민지나 침략으로 약탈해온 문화재들입니다. 만약 의궤를 돌려준다면 다른 국가들도 자국의 문화재를 돌려달라고 강하게 요구할 것이 뻔했습니다. 프랑스는 문화재 유출로 인한 경제적 손실과 함께 문화 선진국이라는 국가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질 것을 우려했습니다.


결국 대한민국 정부와 프랑스는 2010년 서울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에서 5년마다 갱신 대여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이듬해 75권이 국내에 들어오는 것을 시작으로 의궤 297책이 145년 만에 고국의 땅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의궤 소유권이 프랑스에 있는 만큼 우리 문화재로 등록을 할 수 없고, 프랑스가 대여를 거부하면 돌려줘야 한다는 문제점이 남아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신화 속 반인반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