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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May 02. 2023

도마 안중근

1909년 3월 5일에는 김기룡·박봉석·조응순 등 열한 명의 동지와 함께 조국 독립의 회복과 동양 평화의 유지를 위한 ‘동의단지회’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취임했다. 동의단지회 회원 모두는 왼손 무명지 첫 관절을 자른 뒤 펼쳐놓은 태극기에 선혈로 ‘대한독립’이라고 쓰고 대한독립만세 삼창을 외쳤다. 마지막으로 안중근은 태극기 위에 혈서로 ‘동인단지회의 취지문’을 남겼다. 

그해 10월 <대동공보>에 들른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으로 러시아 대장대신 코코프체프를 만나러 온다는 소식을 접했다. 곧 그는 <대동공보> 사장 유전율에게 이토 히로부미 처단의 뜻을 밝히고, 거사에 필요한 자금과 총 세 자루를 받아 10월 21일 우덕순과 함께 하얼빈으로 향했다. 도중에 포그라니치나야에서 옛 동지 유승렬의 아들 유동하를 통역관으로 합류시켰다. 셋은 하얼빈의 국민회 회장 김성백의 집에 머물면서 10월 23일 아침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그리곤 조도선을 찾아가 의거 계획을 설명한 후 합류시켰다.


10월 24일, 의거 장소를 물색하고자 채가구에서 하차한 안중근 일행은 다음 날 둘로 나눠지기로 결정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어디에서 정차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우덕순과 조도선을 채가구에 남기고 어린 유동하는 집으로 돌려보냈다. 홀로 남은 안중근은 역의 구내 찻집에서 차분히 대기하며 머릿속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시나리오를 수십 수백 번 점검했다. 하지만 채가구에서 우덕순과 조도선의 의거가 성공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일분일초가 더디게만 흘러갔다. 한편 채가구에서는 우덕순과 조도선을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이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가 지나가는 동안 그들이 묵고 있는 여인숙을 밖에서 잠가버리는 바람에 거사를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갇혀 있었다. 


드디어 10월 26일 오전 9시 하얼빈역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대장대신 코코프체프의 안내를 받으며 의장대를 사열하고 환영 인파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중근은 환영 인파 속에서 떨리는 감정을 부여잡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토 히로부미가 그동안 사진으로 수없이 봤던 사람인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가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순간 방아쇠를 당겼다. 


안중근은 러시아 대신이 애꿎게 피해를 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여러 차례 방아쇠를 당겼다. 그렇게 발사된 총알은 이토의 가슴과 흉부 그리고 복부를 관통했다. 혹시라도 이토 히로부미가 아닌 엉뚱한 자를 저격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토 히로부미 주변의 일본인에게 세 발을 더 쐈다. 빠른 판단과 뛰어난 사격술 그리고 강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총에 맞은 이토 히로부미는 급히 열차로 옮겨졌으나 20분 뒤에 숨을 거뒀다. 이토 히로부미를 수행하던 하얼빈 총영사 가와가미 도시히코와 궁내부 비서관 모리 야스지로, 만철이사 다나가 세이지로는 중경상을 입었다. 안중근은 의거 이후 도망치지 않았다. 당당하게 ‘코리아 후라(대한 만세)’를 삼창한 뒤 러시아군에게 체포당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에 당혹스러워한 러시아는 책임에서 벗어나고자 안중근을 일제에 넘겼다. 일제는 안중근을 인도받은 뒤에도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과 관련해 우덕순·조도선·유동하 외 열한 명을 체포했고, 국내에 있던 안중근의 두 동생과 모친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구속하고 조사했다. 

안중근의 신병을 넘겨받은 일제는 그를 중국 여순의 관동도독부 관하 법원에 송치해 심문했다. 일제는 안중근을 회유해 변절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자 의거 36일 만에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장 히라이시를 본국으로 소환해 사형 판결을 내릴 것을 지시했다. 


이후 일제는 안중근이 자신을 대한의군참모중장이라고 밝히며 전쟁포로로 대해 달라고 하는 요구를 묵살한 채, 외부 사람들과의 만남을 일체 차단시키며 모진 고문을 가했다. 심지어 연해주에서 파견한 러시아 변호사와 상하이에서 파견한 영국인 변호사의 접견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안중근은 법정에서 의연하고 논리정연하게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을 열다섯 개 항목으로 나눠 열거하며 한중일의 화합과 평화를 주장했다. 


결국 여섯 번의 재판 끝에 2월 14일 일제가 계획한 절차에 따라 안중근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안중근은 의연하게 “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는가?”라며 일제의 의중을 꿰뚫고 있음을 보여줬다. 그는 고등법원에 항소하지 않았다. 옥중에서 자신의 일대기와 생각을 적은 『안응칠역사』와 한중일이 서로 협력해 나아가야 한다는 『동양평화론』을 완성하고자 얼마간의 시간을 달라고 부탁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부탁도 일제는 들어주지 않았다. 3월 26일 안중근은 어머니가 보내준 흰색 명주 한복으로 갈아입고 교수대에 올랐다. 유언이 있는지 묻는 말에 안중근은 “나의 이 거사는 동양 평화를 위해 결행한 것이므로 임석제원들도 앞으로 한·일 화합에 힘써 동양 평화에 이바지하길 바란다.”라고 답하며 “동양 평화 만세”를 부르자고 제의했다. 안중근만이 할 수 있는 위대한 유언을 남기고 오전 10시경 순국했다. 

유해를 돌려 달라는 유족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안중근의 유해는 감옥 수인 묘지에 묻혔다. 심지어 일제는 안중근이 저술한 『안응칠역사』와 미완성인 『동양평화론』마저도 유족에게 돌려주지 않고 숨겼다. 다행히 1979년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 자료실에서 두 책의 등사본이 발견되면서 비로소 안중근이 이루고자 했던 세상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천하를 가지려 했던 항우를 자신과 대등한 존재라고 여기며 한중일 모두가 번영해 평화롭게 살아가길 바랐던 안중근, 열악하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전쟁포로를 풀어주며 작은 이익보다 대의를 우선한 안중근, 원칙을 지켰을 때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리라 믿었던 안중근은 오늘날까지 영웅으로 기억된다. 


조선을 넘어 전 세계가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짧고도 굵은 삶을 산 안중근의 모습은 우리가 나아갈 데가 어디인지 알려준다. 마지막으로 민족의 영웅 안중근의 유해가 발굴되어 효창공원의 삼의사묘로 돌아오길 간곡히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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