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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Apr 25. 2023

거란은 왜 고려를 쳐들어왔을까?


후삼국 시대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10세기 초는 한반도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모든 민족과 국가가 혼란하던 시기였다. 그동안 국제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해오던 신라와 당이 무너지면서, 북방 유목 민족이 흥기하여 동아시아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하였다. 북방 민족이 세운 대표적인 나라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다. 요나라는 건국하자마자 발해를 무너뜨리고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패자로써 중국을 손에 넣고자 하였다. 


당시 5대 10국을 통일하고 중국을 차지하고 있던 송은 군사력 강화보다는 문치주의를 내세우고 있었다. 문치주의의 부작용으로 군사력이 약화된 송은 주변 국가로부터 끊임없이 수탈당하며 위협을 받아야 했다. 송나라에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던 나라는 고려가 유일했다. 


고려는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는 북진정책을 위해 요나라와 전쟁을 벌여야 했다. 또한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받으면서 거란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는 송나라가 필요했다. 반면 송나라는 요나라와 고려가 서로 대치하고 있어야 침략의 위험이 감소할 수 있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들어맞은 고려와 송은 꾸준하게 군사적·경제적 동맹을 통해 안정과 발전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고려와 송의 동맹은 요나라에겐 매우 불편하였다. 


거란은 중국 송나라와 연운 16주를 두고 영토 분쟁을 겪고 있었다. 군사적 우위에 있던 거란은 군대를 집결하면 송을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옛 고구려의 영토를 되찾으려는 고려가 문제였다. 후삼국 시대 수십 년의 전쟁으로 단련된 고려의 강병은 만만하게 볼 수 없었다. 고려를 무시하고 송을 공격할 경우 자칫하면 고려에 모든 영토를 빼앗겨 국가 존속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 


그렇다고 고려를 힘으로 정복시킬 수도 없었다. 풍부한 인구와 물자를 가진 중국을 지배하기 위해 필요한 군사력과 물자를 고려와의 전쟁에 소모할 여유는 없었다. 고려와의 전쟁은 득보다 실이 많은 전쟁이었다. 

거란은 고려를 적이 아니라 우방 국가로 두기 위해 942년 태조 왕건에게 낙타 50마리와 진귀한 보물을 가득 실어 보냈다.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호족의 힘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기 위해 북진정책을 추진하던 왕건은 “거란은 발해왕의 동맹을 어기고 하루아침에 공멸한 무도한 나라로 교류할 수 없다.”라고 천명하였다. 그리고 거란이 보내온 낙타를 만부교 아래에서 굶겨 죽이고 거란 사신들을 유배 보냈다. 이후 고려는 발해 유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북으로 영토를 넓혀나갔다. 왕건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거란은 짐승과 같은 나라로 후대에도 상종하지 말라.”라고 훈요십조에 남겼다

노골적인 고려의 적대행위는 거란의 입장에서 매우 불편하였다. 고려 제3대 정종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광군사(光軍司)를 설치하고 광군 30만 명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북진정책을 재차 강조하며 서경 천도를 준비하였다. 중국을 침략하려다 오히려 고려에 멸망할 수도 있겠다는 우려를 갖게 된 거란은 고려를 세 번에 걸쳐 침략하였다. 그러나 서희, 양규, 강감찬과 같은 걸출한 인물들과 고려 관민들이 똘똘 뭉쳐 거란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었다. 


결국 요나라는 고려를 먼저 침공했다가 국력을 소진하고 약해지다가, 여진족이 세운 금에게 멸망하였다.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을 제압하면 동아시아를 지배할 수 있었지만, 굴복시키지 못하면 약소국으로 전락하거나 멸망한다는 공식이 또다시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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