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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May 09. 2023

어린이가 행복한 세상을 만든 색동회

어린이를 위해 색동회를 만들다

일제강점기 시절 대다수 어린이는 꿈과 희망을 갖기 어려웠다. 나라를 빼앗긴 어른들은 부끄러움에 아이들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한국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한국 어린이를 대놓고 무시했다. 무엇보다도 일제의 수탈로 경제적 궁핍을 겪는 많은 아이가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아이들은 학교 갈 시간에 집안일을 돕거나 산업현장에 투입되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래에 관한 꿈을 꾼다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이 현실을 우려하며 안타깝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어린이가 아무 걱정 없이 밝고 순수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하나둘 방정환 하숙집으로 모였다. 이들은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또다른 독립운동이라 믿었다. 더불어 우리 아이들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것이라 굳게 믿었다. 


이들 중심에 하루 종일 어린이를 행복하게 만들 생각만 하는 소파 방정환이 있었다.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방정환은 자신과 뜻을 함께할 친구를 찾아다녔다. 이 당시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방정환과 윤극영의 만남이다. 1923년 자신을 찾아온 방정환을 처음 만난 날 윤극영은 방정환이 쓴 <형제 별>을 동요로 만들었다. 그리고, 방정환은 윤극영이 치는 피아노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밤새도록 어린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윤극영은 이날 방정환이 “당신은 어린이가 부를 노래를 만들어라. 자신만을 위한 음악 공부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장차 나라를 이끌어 갈 우리 어린이들이 즐겨 부를 노래가 없네.”라고 했던 말을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또렷하게 기억했다. 왜냐하면 그날이 자신의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가 명확해지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색동회를 조직한 방정환(1899~1931)

방정환은 서울 종로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던 할아버지 아래에서 부족함 없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무너지자 방정환의 집안 가세가 기울었다. 학교에 도시락도 가져가지 못하는 방정환이었지만, <소년입지회> 총대장에 임명된 그는 토론과 동화구연을 통해 10명에 불과했던 회원을 160명으로 늘릴 정도로 탁월한 리더십을 보였다. 하지만, 방정환은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에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토지조사국에서 서류를 베끼는 사자생으로 취직했다.


어찌 보면 너무도 평범하게 살아갔을 지도 모를 방정환의 삶이 180도 바뀐 것은 민족지도자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손병희와의 만남이었다. 손병희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19살의 어린 방정환이 가진 잠재력과 훌륭한 인성을 마음에 들어하며 자신의 셋째 사위로 삼았다. 이후 방정환은 손병희의 지원을 받아 포기했던 학업을 다시 이어 나가며 꿈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학업에 전념하던 방정환은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체포되어 고초를 당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뚜렷하게 깨닫게 된다. 이후 방정환은 천도교에서 종합지인 <개벽>에 ‘어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본격적으로 어린이를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요주 인물로 낙인찍힌 상황이어서 방정환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고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공부가 목적이 아니었던 방정환은 주기적으로 국내에 들어와 강연을 하고,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여 어린이에게 존댓말 쓰기 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어린이에게 교훈을 줄 수 있는 세계 명작 동화 10편을 번역한 『사랑의 선물』을 출간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일은 1923년 5월 1일 색동회 설립이었다.      


한국의 얼을 심어주기 위해 참여한 손진태(1900~?)

부산에서 태어난 손진태는 5살에 해일로 어머니를 잃고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이후 서울로 상경한 손진태는 중동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3.1운동으로 4개월간 옥살이하면서 민족정신을 바로 세우기 위해 역사를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일본 와세다대학 사학과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어린이들이 우리의 신화와 전설 그리고 동화를 접한다면, 자연스럽게 민족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애국심이 형성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방정환과 함께 색동회를 설립하기로 뜻을 모았다. 


색동회를 통해 어린이들이 변화되는 모습을 보며 희망이 생긴 손진태는 “우리 민족은 어떻게 성립됐고, 우리 문화의 기초는 어떻게 구성되었는가.”를 알리기 위해 전국 각지를 돌며 자료를 수집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민담집(1930)>, <조선민족설화의 연구(1947)> 등 11권의 책과 120여 편의 글이 남겼다. 광복 이후에도 문교부 차관 겸 펀수국장이 되어 <국사> 교과서를 만드는 데 크게 공헌했다. 하지만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동화극으로 어린이를 만난 정인섭(1905~1983)

경상남도 언양에서 태어난 정인섭은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서 공부하면서, 언양에 여자 야학교를 개설할 정도로 한국인 계몽에 큰 관심을 가졌다. 또한 정인섭은 와세다대학에서 영어 교과서로 사용할 <세계 동화집>을 교수 밴톡과 함께 저술할 정도로 뛰어난 영어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세계 명작 동화를 번역하여 어린이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손진태는 정인섭을 찾아가 색동회의 취지를 설명했고, 정인섭은 흔쾌히 참여하겠다고 말했다. 


색동회 회원이 된 정인섭은 <어린이>에 영문동화를 번역해 싣는 것을 시작으로 조선일보에 <호랑이 이야기> 등 여러 동시와 동화를 영문으로 연재하였다. 또 본인의 창작한 영문동화인 <소년국(The Counrty of Youth>과 한국 동화 <고양이와 쥐> 등도 연재했다. 또한 일본어판 조선 설화집 <온돌야화>를 출간하여 일본과 세계에 우리의 구비문학을 알렸다. 이 책의 서문에 적힌 ‘내가 일본어로 발표하는 동기는 조선을 보다 근본적으로 내적으로 깊은 곳까지 일본사람들에게 잘 이해시키기 위한 하나의 노력이며, 특히 조선에 대해서 방관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은 일단 온돌야화로서 친숙해지기 바람이다.’를 보면 정인섭이 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글을 썼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광복 이후에도 정인섭은 전설, 민담, 우화, 고전소설 등을 영어로 수록한 <한국의 설화>를 출판했다. 이 외에도 어린이가 순수한 동심을 잃지 않도록 용기를 주는 동시를 발표하였다. 하지만, 정인섭은 안타깝게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1940년대 친일반민족행위를 저질렀다.      


진주의 방정환으로 불린 강영호(1896~1950)

강영호는 진주 봉래초등학교를 설립한 정3품 벼슬을 했던 강재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 강상호도 진주에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29명 중 한 사람일 정도로 그의 집안은 나라를 위한 일에 늘 앞장섰다. 강영호도 가족의 영향을 받아 1920년 진주청년친목회 임원으로 항일전단지를 배포하다 도피할 정도로 애국심이 투철했다. 그런 그였기에 색동회를 운영하면서 발생하는 여러 어렵고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했다. 일본에서 귀국한 뒤에도 강영호는 고향인 진주에서 신간회 회원으로 항일 강연을 다니고, 반제단 지방단부를 조직하는 등 끊임없는 독립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50년 6·25전쟁 중에 군경에게 처형되어 현재까지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다.      


반달 할아버지 윤극영(1903~1988)

어린 시절 서로의 손바닥을 마주치며 부르던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으로 시작하는 <반달>을 작곡한 윤극영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성고등보통학교(현재 경기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윤극영은 이곳에서 『상록수』를 쓴 심훈, 일본 왕을 죽이려 했던 박열을 만나며 애국심을 키워나갔다. 


윤극영은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자기 적성과는 맞지 않는 교육과정에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 동경음악학교와 동양음악학교에 입학하여 성악을 배웠다. 이때 자신을 찾아온 방정환을 만난 윤극영은 어린이를 위해 평생 살아가겠다고 결의하며, 직접 색동회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한 약속데로 윤극영은 6·25전쟁으로 경제적 어려움속에도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가사를 지닌 <설날> 등 수많은 동요를 작곡하며 어린이에게 희망을 주었다. 윤극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방정환을 떠올리며 색동회를 다시 조직하고 제3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친구이자 존경하던 방정환을 사람들이 기억하기를 바라며 동상 건립에 나섰다.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을 만든 마해송(1905~1966)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1905년 개성에서 태어난 마해송은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거처 보성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학교에서 존경받던 한국인 교사가 부당하게 해고되는 모습에 분을 참지못하고 항의하다가 퇴학당하고 말았다. 결국 마해송은 어쩔 수 없이 일본 니혼대학 예술과에 입학해야만 했다. 유학 생활을 하는 동안 마해송은 극단 ‘동우회’를 조직하여 방학 때마다 국내로 귀국하여 민족정신을 일깨워주는 공연을 진행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마해송에게 가장 뜻깊은 일로 기억되는 것은 방정환과 색동회를 조직한 일이었다. 색동회 활동을 하면서 마해송은 『어린이』 잡지를 통해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동화인 <방위나리와 아기별>을 발표했다. 


대학 졸업 후 마해송은 일본 최대 종합잡지사 ‘문예춘추사’에 입사하고, 발행 부수 10만 부가 넘는 잡지사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마해송은 잡지사를 운영하는 바쁜 과정에서도 어린이에게 희망과 민족정신을 심어주는는 <토끼와 원숭이>, <호랑이와 곶감> 등 여러 작품을 계속 발표했다. 광복 이후에는 ‘어린이는 건전하게 태어나 따뜻한 가정에서 사랑 속에 자라야 한다.’라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을 기초하여 우리 어린이들이 마음껏 웃으며 살아가는 세상이 오기를 꿈꿨다.     


되살아난 색동회

위에서 언급한 분들 외에도 많은 사람이 참여한 색동회는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줄 수 있는 《어린이》 아동 잡지를 창간하고,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제정(1927년 5월 첫째 월요일로 변경)하였다. 이 외에도 세계아동예술전람회와 동화·동요회를 개최했다. 그러자 일제는 색동회를 독립운동단체로 간주하고 탄압하였다. 


일제의 방해로 방정환은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져서 1931년 죽고 말았다. 방정환이 죽자 색동회 활동도 멈춰버렸다. 잡지 《어린이》가 1934년 폐간되고, 어린이날 행사가 1937년 일제에 의해 전면 금지되었다. 여기에 1940년대 일제의 민족말살통치도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 어린이들은 강제적으로 송진을 채취하여 학교에 제출하고, 황국신민서사 아동용을 강제로 외우면서 일본의 식민지인으로 살아가기를 강요당했다.


다행히도 일본이 패망하여 광복을 맞이하자, 많은 이들이 색동회를 떠올렸다. 색동회에 참여했던 사람 외에도 잡지 <어린이>를 읽으며 꿈을 키웠던 사람들이 모여 색동회를 부활시켰다. 이들은 <어린이> 잡지를 1946년 다시 발행하고,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제정하였다. 그리고 어린이가 세상의 주인공으로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희망했던 방정환을 기억하기 위해 1956년 소파상을 제정하였다. 이들의 활동이 하나둘 쌓여가자, 대한민국 정부도 색동회 활동을 인정하며 1975년 5월 5일 어린이날을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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