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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Nov 07. 2023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한 진짜 이유는?

삼한 시대부터 울릉도를 중심으로 인근 도서 지역을 담당하던 우산국이 있었다. 크지 않은 영토였지만 광활하고 거친 바다 위에서 생활하는 억세고 거친 사람들이었기에 주변 국가들도 쉽게 건들지 못하였다. 또한 우산국을 정복하고 싶어도 울릉도에는 배를 정착할 수 있는 항구가 하나밖에 없어서 어떤 국가도 쉽게 정복할 수가 없었다. 또한 울릉도는 화산섬이지만 물이 부족하지 않았고 농사도 잘되는 지역으로, 함대를 항구에 정착시키지 못하면 승리는 늘 우산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산국이 오랫동안 독립국으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정복했을 때 가져올 이익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라는 우산국을 왜 정복했을까? 그 이유는 우산국의 마지막 왕인 우해와 풍미녀의 전설을 가지고 유추할 수 있다. 전설 속 우산국의 마지막 왕인 우해는 능력도 특출하였지만 백성들과 동고동락해 신망이 높았다. 그러던 어느 날 대마도의 왜구가 우산국 인근에 나타나 해적질을 하자, 우해는 전함을 이끌고 대마도 정벌에 나섰다. 당시 대마도의 왕은 우해 왕을 이길 수 없어 화친을 부탁하며 배반하지 않겠다는 증표로 셋째 딸 풍미녀를 주었다.     


우산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해는 풍미녀와 사랑에 빠졌다.우산국으로 돌아온 우해 왕이 풍미녀를 아내로 맞아 어여쁜 딸을 낳으면서, 국가와 백성의 삶을 돌보지 않았다. 오로지 풍미녀만이 우해 왕이 보는 세상 전부였다. 사치와 향락을 좋아하는 풍미녀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일 순위가 된 우해 왕은 더 이상 예전의 훌륭한 군주가 아니었다. 우해 왕이 수탈과 폭정만 일삼는 폭군이 되자, 우산국 사람들의 삶은 팍팍해지고 어려워졌다. 우산국 주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노략질하러 내륙으로 자주 나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우산국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삼척 지역을 자주 노략질했다. 삼척 지역을 관할하던 이사부는 우산국의 계속되는 노략질을 마냥 간과할 수 없어 군대를 이끌고 우산국을 쳐들어갔다.     


하지만 우산국에 배를 정착시키지 못하면서 점령이 어려워지자, 이사부는 뱃머리에 나무로 만든 사자를 펼쳐 놓았다. 그리고 항복하지 않으면 섬에 사자를 풀어버리겠다고 협박하였다. 처음 보는 사자의 모습에 기가 죽어버린 우산국 사람들은 항복을 한 뒤 신라에 공물을 바쳤다. 이때 뱃머리에 만들어놓았던 사자는 울릉도의 사자바위가 되고, 우해 왕이 이사부 앞에서 항복하기 위해 벗어둔 투구는 바위로 변했다고 한다. 이때가 512년으로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의 영토로 편입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전설처럼 우산국이 신라를 노략질했기에 정복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신라는 우산국과 왜가 연합한다는 사실 에 높은 경계심을 보인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왜-우산국이 연합한다면 북쪽의 고구려까지 포함해 신라는 사방이 적군에 둘러싸여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지증왕은 중국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새롭게 다시 시작하려는 야심만만한 왕이었다. 그런 그에게 우산국과 왜의 협력은 매우 위험한 징후였다. 그래서 신라 지증왕은 이사부를 통해 그중에서 가장 힘이 약한 우산국을 정벌토록 하였다. 이를 통해 신라는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면서 동해안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산국을 정복한 명분으로 풍미녀에게 빠진 폭군 우해 왕, 그리고 나무 사자를 진짜라고 오인할 정도로 어리석은 우산국 백성을 내세웠다. 또한 우산국 사람들이 신라에 귀순하기를 스스로 원했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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