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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Oct 31. 2023

성과 없는 미소공동위원회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에 따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 20일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렸어요. 여기서 가장 심도 있게 논의할 주제는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협의할 대상 정당과 사회단체의 자격을 결정하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미국 수석위원 아놀드 소장과 소련 수석위원 스티코프 중장은 의견을 하나로 모으지 못했어요. 가장 큰 이유는 서로 자신에게 협력할 정당과 사회단체를 끌어들여 임시정부를 수립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소련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협의대상자로 모스크바 3상 외상 회의를 지지하면서 소련을 거부하는 집단이나 인물은 배제하려고 했어요. 미국은 우파 세력을 더 많이 참여시키기 위해 의사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며 신탁통치에 반대한 집단이나 인물을 제외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맞섰고요. 결국 미국과 소련은 협의할 정당과 사회단체 선정을 두고 합의를 이루지 못해요.


사실 미국과 소련은 처음부터 어떤 한국 정부를 수립할 것인지 생각이 달랐어요. 미국은 남한 지역만이라도 친미적인 국가를 수립하여 소련을 견제하려고 했어요. 마찬가지로 소련도 북한 지역에 친소적인 국가를 수립하려 했어요. 그렇다 보니 결국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어떤 성과도 내지 못하고 5월 8일 중단되고 말아요. 이후 미국은 미·영·중·소 4대국 회의를 열어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협정을 빨리 이행하자고 주장했어요. 영국과 중국이 자신을 지지하면 상황을 미국 뜻대로 이끌어갈 자신이 있었거든요. 이걸 눈치챈 소련은 4대국 회의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합의된 사항이 아니라며 강하게 거절했어요. 


중도 우파 김규식과 중도 좌파 여운형은 미·소의 대립으로 민족이 분열될까 걱정하며 좌우합작운동을 일으켰어요. 미군정은 좌·우익의 대립을 해소하려는 김규식과 여운형을 지지했어요. 반탁운동을 전개하면서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하지 않는 세력 대부분이 미군정을 지지하는 세력이었거든요. 그래서 김규식과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하여 상황을 반전시키려 했어요. 하지만 미국의 지지는 오래가지 못했어요. 미국이 소련을 봉쇄하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좌우합작운동에 대해 지지를 철회하거든요.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어요. 하지만 제1차 때와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미국과 소련은 한국의 자주적인 국가 수립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오로지 어떻게 하면 한반도를 자국의 이익에 더 도움이 되게 운영할까만 계산했어요. 미국은 기존의 주장대로 좌우합작을 통하여 새로 결집한 중도 세력과 함께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단체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이에 대해 소련도 모스크바 합의를 인정하지 않는 반탁 단체의 참여를 허용하지 않겠다고 맞섰어요. 그로 인해 가장 애를 태우고 피해를 보는 것은 우리였어요. 강대국에 의해 자주적인 통일 정부를 세우는 일이 더욱 멀어져갔으니까요. 


미국은 더는 소련과 합의를 이룰 수 없다며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 수립해야 한다며 유엔에 한국 문제를 이관했어요. 이에 맞서 소련은 미·소 모두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조선 인민에 의한 자주적 총선거하자고 주장했고요. 결국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도 아무 결론을 내지 못하고 끝나버려요. 이것은 통일된 정부수립이 불가능해지고 분단 정권 수립만 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해요. 더 나아가 미국과 소련이 본격적으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냉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일이기도 했어요. 문제는 냉전의 시작점이 한반도였고, 그로 인해 훗날 약소국이던 우리가 끔찍한 비극을 겪게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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