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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Dec 19. 2023

최초의 조약 강화도조약

1873년 조선에 큰 변화가 일어나요. 조선의 국정을 좌지우지하던 흥선대원군이 하야하고, 성인이 된 고종이 직접 정치에 나서거든요. 고종은 흥선대원군을 따르는 사람을 조정에서 쫓아내고, 국정 쇄신을 위해 새로운 사람을 발탁하고 중용해요. 그중에는 조선도 개항하여 급변하는 국제사회의 질서에 동참해야 한다는 개화파들도 있었어요. 고종은 개화파의 주장을 받아들여 통상수교거부정책 대신 개항하기로 결정해요. 이제 어느 나라와 어떻게 통상수교를 맺을 것인지가 중요한 국정과제가 돼요. 같은 시기 일본은 조선과 국교를 회복하고자 했어요. 그 이유는 간단해요. 조선을 발판으로 삼아 일본의 자존감을 높이며 경제적 침탈로 많은 이익을 얻으려고요.


1874년 일본이 타이완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박규수를 비롯한 개항론자들은 일본과의 국교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마침 그해 11월 일본 외무대승 모리야마 세게루가 부산에 들어와 국교를 회복하자는 외교문서를 올려요. 그런데 일본이 보낸 문서에 ‘대일본 황상’이라는 용어가 적혀있어서 조선은 문서접수를 거부해버립니다. 왜냐면 조선에 있어 황제국은 중국뿐이었거든요. 오랑캐라 얕보던 일본이 황상이라는 단어를 마음대로 쓴 것을 괘씸하게 여긴 것이죠. 모리야마 세게루는 조선의 냉담한 반응을 보고, 미국이 일본에 했던 것처럼 무력을 동원하여 국교 수립을 맺어야 한다고 보고서를 올려요.


일본 정부는 모리야마 세게루의 의견을 받아들여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수교를 맺기 어렵고, 혹여 수교를 맺는다고 해도 우위를 점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며 1875년 4월 군함 운요호, 가스가호, 다이니테이보호를 조선에 보내요. 일본 군함은 부산에서 대포를 쏘며 시위한 뒤, 함경도 영흥만까지 올라가는 행동으로 조선을 위협했어요. 그럼에도 조선 정부의 태도가 변하지 않자, 일본은 그해 8월 다시 운요호를 조선으로 보내요. 이번에는 조선의 수도 한양 가까이에 있는 강화도로요.

운요호가 강화도 초지진에 상륙하려 하자, 초지진을 지키는 조선군은 대포를 발사하며 일본군의 상륙을 저지해요. 그러자 일본군은 초지진에 많은 포탄을 쏟아붓고는 인천 영종진으로 건너가요. 그리고는 그곳에 있던 관아와 민가를 불 지르고, 아무 죄 없는 백성을 무차별 살상합니다. 전리품으로 36개의 대포와 총포를 챙긴 일본 운요호는 유유히 일본 나가사키로 돌아가요.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난 1876년 1월 일본 정부는 식수를 구하려는 운요호를 조선군이 공격한 일을 문제 삼으며 육군 중장 구로다 기요타카를 특명 전권대신으로 조선에 보내요. 4,000여 명의 일본군과 함께 말이죠. 이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구로다에게 교섭이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군사적 보복이 따를 것이라는 위협을 주라고 지시해요. 그에 맞추어 일본은 법률고문이던 프랑스인 부아소나드에게 전쟁 명분을 찾게 하면서, 군대를 서부지역으로 이동시켜요. 조선 정부도 이런 식으로 개항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일본의 군사적 압력과 청나라의 개항 권고를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었어요. 결국 신헌을 접견대신으로 파견하여 강화도에서 협상을 맺게 해요. 그렇게 맺어진 조약이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이에요.

조선은 ‘옛날의 우호를 다시 세운다.’라는 문구를 협정문에 넣어 교린 관계를 유지했다고 생각했어요. 또한 조약에 ‘일본국 황제 폐하’를 사용하지 않고, ‘대일본군’과 ‘대조선국’으로 표기하여 대내외적으로 문제 될 소지를 없앴다고 판단했죠. 그 결과 강화도조약은 조선이 근대 국제법에 따라 외국과 맺은 첫 수교인 동시에 국제사회로 진입하는 계기가 돼요. 하지만,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는 불평등한 내용으로 인해 여러 어려움을 겪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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