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서울의 춘추관외에 충주, 전주, 성주 세 곳에 문고를 보관하는 건물인 사고(史庫)를 세웠다. 전주사고는 1445년(세종 27년)부터 실록각 건립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으나 흉작 등으로 기금을 마련하기 어려워 성종 때인 1472년 양성지를 봉안사로 삼은 뒤에야 공사에 착수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473년에 전주사고가 완성되어 실록을 봉안하기 시작했다.
이후 전주사고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까지 조선왕조의 기록을 보관하며 2~4년에 한 번 봄과 가을에 서책을 꺼내 말리며 실록 관리에 정성을 다했다. 하지만 왜군이 충남 금산까지 내려오자 서책관리가 문제가 아니라 온전하게 지켜낼 수 있는지가 중요한 관건이 되었다. 이미 춘추관과 충주 그리고 성주사고는 왜군에 의해 모두 불에 타버려서 전국에 남아 있는 사고는 전주사고밖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보다 대다수의 평범한 민중이 우리나라를 지켜온 역사가 여기서도 어김없이 적용되었다. 높은 관리들은 왜군이 지척에 있다는 소식에 모두 도망쳤지만, 오늘날 공무원 9급 정도에 해당하는 종9품의 경기전 참봉 오희길은 자신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끝까지 남았다. 그러나 혼자서는 태조 영정과 13대 임금의 기록이 담긴 총 805권 614책 및 다른 책을 옮길 수가 없어 깊은 고심을 빠졌다.
고민 끝에 오희길은 인근에 높은 덕망으로 존경받던 손홍록을 찾아가 전주사고에 보관된 책을 왜군으로부터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손홍록은 오희길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깊은 공감을 표하며 친구인 안의와 조카 손숭경을 불러 도움을 요청하고 하인 30여 명을 데리고 전주사고로 향했다. 그리고 전주사고에 있는 수많은 서적을 말과 나귀에 싣고 내장산의 은봉암으로 가져가 숨겨두었다. 이후 만에 하나라도 왜군에게 발각될 것을 우려해 태조의 어용만 따로 비례암으로 옮겨 서책이 모두 소실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다행히 충남 금산에서 조헌과 700여 명의 의병이 왜군을 막아내면서 전주사고의 서책들은 1년 가까이 내장산에서 안전하게 보관될 수 있었다.
이후 조정은 전주사고의 서책들이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다는 소식에 바닷길을 이용해 영변 묘향산 보현사에 옮겨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조선 조정은 1603년 서책을 강화도로 옮겨 전주사고본을 토대로 5개의 실록을 새로이 만들어 강화,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 춘추관 전국 5곳에 보관했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대부분의 관료들이 사고를 지키지 않고 도망친 점을 감안해, 사고 주변에 있는 사찰을 선정해 그곳의 승려들이 사고를 지킬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만들어진 사고들도 현재까지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 서울 춘추관에 있던 실록은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때 불타버렸고, 오대산에 보관하던 실록은 일제가 동경제국대학으로 1910년 가져갔다가 관동대지진 때 모두 소실되어 버렸다.
현재 남은 두 개의 사고 중 묘향산에 있던 사고는 전라도 무주를 거쳐 구황실 문고에 따로 보관했으나 6·25 전쟁 때 북한에 빼앗겼다. 남한에 있는 것은 강화도 정족산과 태백산에 있던 실록을 합친 것으로 조선총독부 학무과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현재는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보았을 때 조선왕조실록이 현재까지 보관되고 있는 것은 역사와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선조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다른 국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적과도 같은 일로 조선왕조실록과 더불어 전주사고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자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