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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묻고 답하기

by 유정호

일본은 왜 임진왜란을 일으켰나요?

아마도 많은 분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유를 아시고 계실 거예요. 그래서 저는 간단히 말씀드릴게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00년간의 내전을 끝냈지만, 여전히 많은 다이묘가 사병을 거느리고 있어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죠. 동시에 내전을 끝낸 자신감으로 중국을 지배하려는 야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명나라 정복을 내세우며 조선에 정명가도, 즉 명나라를 치러가야 하니 길을 내놓으라며 1592년 조선을 침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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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국내 정치를 안정시키는 동시에 더 큰 야망을 실현하려는 말이네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우리에게 매우 나쁜 인물이지만, 일본인들에게는 매우 존경받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이 섬이라는 한계를 벗어나 세계의 중심으로 나아가고 더불어 최강이라는 자부심을 심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것을 알지 못했나요?

안타깝게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수년 전부터 일본의 침략이 예고되고 있었어요. 대마도주만이 아니라 지금의 오키나와에 있던 유구왕국이 계속 침략을 예고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중계무역으로 취하는 이득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했거든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선은 임진왜란 발발 100년 전 세조 때 신숙주가 일본에 다녀와 쓴 <해동제국기>가 일본을 소개하는 최신 자료였어요. 계속되는 경고에 선조는 통신사를 보내지만,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김성일의 주장을 받아들이며, 혹시라도 모를 전쟁 대비를 중단하게 됩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점은 전쟁을 대비하는 과정에서 이순신 장군이 빠른 승진으로 전라좌수사가 되어 전쟁을 대비한 것이죠.


임진왜란 초 조선은 왜 그토록 약한 모습을 보였나요?

이것은 단순하게 선조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오랜 시간 훈구파의 부정비리로 백성들은 삶이 어려워 군역을 회피할 정도로 국가 체제가 무너져 있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죠. 일본군이 한반도에 상륙했을 때 많은 장수가 도망친 것에 개인적인 책임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훈련받은 병사들이 없는 상황을 감안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죽하면 여진족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던 신립 장군도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병졸들이 도망갈까 우려되어 절벽과 강물로 퇴로가 없는 충주 탄금대에서 맞서 싸우다 자결했겠어요.


선조는 이때 어떤 대책을 내놓았나요?

대책은 명나라에 구원요청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관료들과 백성에게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며 큰소리치고는 늘 야반도주하는 모습을 보였죠. 서울에서 개성, 평양, 의주까지요. 선조는 명나라가 도와줄 것이라 믿었지만, 막상 돌아온 결과는 의심이었죠. 명나라는 고구려의 후손인 조선을 군사 강국으로 여기고 있어서, 조선의 말도 안 되는 패배가 일본과 손을 잡고 명나라군대를 유인하여 몰살시키려는 계획이라 생각한 거죠. 일본이 정명가도를 내세운데다, 조선의 패배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러자 선조는 자신만이라도 망명을 받아달라고 요구합니다. 신하들이 아직 무너지지 않은 지역이 있는 만큼 망명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죠. 그러자 선조는 그렇다면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줄 테니 함께 잘 싸우라고 말합니다.


계속 패배하던 전쟁의 판도가 어떻게 바뀌었나요?

선조가 망명하지 못하고 광해군에게 책임을 떠넘길 무렵 희망스러운 소식이 들려옵니다. 이순신이 남해안에서 일본 수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하고 있다는 승전보가 올라와요. 관군이 도망간 상황에서 백성 스스로 고을과 가족을 지키기 위한 의병이 되어 일본군을 공격하여 승리한다는 소식이 들려와요. 이순신과 의병의 활약이 왜 중요하냐면, 일본군이 북진할 수 없도록 보급로를 차단했기 때문이에요.


조선에서의 승리에도 명나라는 여전히 조선을 의심했나요?

아니요. 명나라도 조선군의 승리 소식과 함께 유구국이 조선을 도와야 한다는 문서를 올리는 등 여러 정황상 조선과 일본이 한 편이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생각하죠. 어차피 일본군에 맞서 싸운다면 명나라 영토가 아닌 조선의 영토에서 싸우는 것이 좋겠다고요. 그렇게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대군이 조선에 들어와 평양성을 조선군과 함께 탈환하면서 임진왜란은 국제전이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임진왜란에서 다양한 무기가 활용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전통적으로 한·중·일은 사용하는 무기가 달라요. 넓은 평야가 많은 중국은 기다란 창을 주 무기로 삼아요. 그래서 삼국지의 여포의 방천화극, 관우 청룡언월도가 유명하죠. 반면 산성에서 원거리 공격으로 적과 맞서 싸우는 우리는 활이 주 무기에요. 고주몽, 이성계 등 활을 잘 쏘는 인물이 나라를 건국하기도 하죠. 일본은 좁은 배와 섬에서 싸우느라 칼을 주 무기로 싸워요.

그런데 임진왜란은 이 바탕 위에 새로운 무기들이 등장합니다. 우선 명나라는 홍이포라는 새로운 무기가 등장합니다. 홍이포란 뜻이 붉은 머리와 수염을 가진 오랑캐가 쓰는 대포라는 뜻으로 네덜란드에서 도입한 서양 대포죠. 기존의 대포보다 정확도와 사거리가 높아지면서 막강한 위력을 선보였습니다. 일본은 아마 머릿속에서 떠올린 조총입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명중률과 위력이 뛰어나서 조총이라 불린 소총이죠. 1열이 발포 후 장전하는 동안 2열이 발포하는 방법으로 장전 속도가 느린 단점을 보완했어요.

조선의 신무기는 아무래도 거북선이겠죠. 정확히는 태종 때도 거북선이 있는 만큼 이순신의 거북선과 어떤 연관성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전투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된 것은 임진왜란이죠. 사방으로 대포와 활 또는 승통을 발사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일본군이 배로 뛰어올라 공격하지 못하도록 철갑으로 지붕을 덮었죠. 일본 수군은 거북선만 보면 오금을 저리며 도망칠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었죠. 또한 이장손이 발명한 비격진천뢰가 있어요. 지금의 수류탄으로 폭파 시간 조절이 가능했던 비격진천뢰는 박진이 경주전투에서 승리하는 큰 역할을 합니다.


첨단무기의 사용으로 전쟁이 길어졌나요?

그것도 일정부분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더 큰 원인은 사람에게 있었죠. 명나라 이여송은 평양성 전투에 승리하고는 자만심에 성급하게 한양을 탈환하려다 벽제관전투에서 크게 패배합니다. 다시 일본에게 유리해질 수 있는 상황에서 권율 장군이 행주산성에서 일본군 총공격에 맞서 큰 승리를 거두며 서로의 눈치만 살폈죠. 결국 명나라 이여송과 심유경은 일본군 고니시 유키나가는 휴전하는 데 의견을 모으고 협상을 벌여요. 조선은 배제하고요. 이 과정에서 충청, 전라, 경상도를 일본에 넘겨주는 데 합의가 이루어지는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나옵니다. 다행이라고 할까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 공주를 첩으로 보내라는 요구를 명 황제에게 보고할 수 없던 심유경은 이런저런 방법으로 거짓 보고하다가 협상이 깨져버렸죠. 우리로서는 너무 어이가 없어 화가 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네요. 동시에 교훈도 주죠. 나를 지킬 힘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음을요.


그래서 다시 전쟁이 시작된 건가요?

네. 저번 시간 말씀드린 것처럼 일본은 다시 전쟁을 해야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너무도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거짓 정보로 이순신 장군을 백의종군시키고 정유재란을 일으키죠. 이순신이 없는 조선은 그동안 빼앗기지 않았던 최대 곡창지대인 호남까지 잃게 됩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으로 승리하고, 조명연합군이 천안지역인 직산에서 승리하면서 다시 전쟁은 소강상태가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더는 전쟁을 계속할 이유가 없어진 일본군은 퇴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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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순신 장군은 왜 노량해전을 벌였나요?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을 그냥 보내면, 국내 정치가 수습되는 데로 다시 쳐들어올 것이라 여긴 거죠. 반면 선조와 명나라는 오랜 전쟁으로 지쳐있으니 그냥 보내주자. 오히려 돌아가는 길을 막으면 분탕질로 상황이 더 안 좋아질 수 있다고 판단했고요. 이순신은 이번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죠. 명나라 제독 진린을 설득하여 일본으로 돌아가는 일본 수군의 500여 척 가운데 450여 척을 침몰시킵니다. 그 결과 일본은 200년 동안 조선을 감시 넘볼 생각을 하지 못했죠.


선조는 이순신 장군에게 고마워했나요?

아니요. 선조는 명나라의 도움으로 임진왜란에 승리했다고 믿었어요. 명나라군대가 참전할 수 있도록 자신을 호종한 신하들의 공로가 제일 컸다고 평가하는 한편, 우리나라 장졸은 실제로 적을 물리친 공로가 없다고 평가했어요. 그래서 의주까지 따라온 86명을 호성공신으로 삼고 일본에 맞선 신하는 18명만 선무공신으로 삼아요. 그러나 임진왜란에서 관군은 105번의 전투 중에 65번 승리하고, 40번을 패했습니다.


그렇다면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지킨 분들을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모두를 소개할 수 없어서, 몇 분만 말씀드릴게요. 김포에서 태어난 조헌이 있어요. 조헌은 선조에게 직언하다가 쫓겨난 뒤 충북 옥천에서 후학을 양성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 수복에 큰 공을 세웁니다. 고바야카 다카가게가 이끄는 일본군이 호남으로 가는 길목인 금산을 공격한다는 소식에 영규 스님 휘하 800명의 승병과 힘을 합쳐 3번에 걸친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냅니다. 이 과정에서 한 분도 도망가지 않고 맞서 싸우다 희생한 결과 주력군을 잃어버린 일본군은 물러나고 맙니다.

조명연합군의 일원으로 평양성을 탈환한 사명대사는 가토 기요마사 부대에 들어가 명과 일본군의 휴전협정을 알아낸 뒤 <토적보민사소> 상소문을 올려 대책 강구를 촉구해요. 임진왜란이 끝나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두 차례 만나 재침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3천 명의 조선인을 데려옵니다.

이 외에도 최초의 의병장으로 알려진 홍의장군 곽재우도 있죠. 의령에서 10명의 노비로 시작한 부대는 2천 명 정도 유지하면서 낙동강 지역에서 위장과 매복 전술 등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어요. 곽재우와 함께 호남을 지켜낸 김덕령, 함경도에서 가토 기요마사를 격퇴한 정문부, 진주성을 지킨 김시민 등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누구보다 나라를 위해 앞장서 싸웠던 이들 모두가 일본군에 의해 희생되거나 혼란스러운 정치의 변동에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기억하고 고마워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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