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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묻고 답하기

by 유정호

선조는 왜 광해군을 왕으로 앉히기 싫어했나요?

선조가 조선 최초의 방계 출신 왕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선조는 특히 정통성이 약하다는 것에 콤플렉스가 심했어요. 더욱이 왕비에게서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참지 못했죠. 그래서 어떡하던 왕비에게서 아들을 보고 싶었지만, 정작 신하들은 세자가 책봉되지 않는 현실에 불안해하면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귀양과 같은 처벌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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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과정에서 세자로 책봉한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맞습니다. 임진왜란 초반 명나라의 도움이 없자, 현실을 감당하기 어려워하며 광해군에게 책임을 떠넘깁니다. 너희들이 그토록 광해군을 원했으니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말이죠. 이 말에 광해군을 비롯한 많은 관료가 펄쩍 뛰며 거둬들여달라고 말하자,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는 조정을 일부 나누어주며 일본군에 맞서게 합니다.

광해군은 맡은 일을 충실히 잘 수행했나요?

임해군을 비롯한 다른 왕자들이 거들먹거리다가 일본군의 포로가 되는 것과는 달리 광해군은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며 관군을 재정비하는 데 성공합니다. 선조로 잃어버린 민심이 다시 돌아오게 만들면서 반전을 끌어낸 거죠.


그렇다면 광해군은 무난하게 왕위에 올랐겠네요.

아니요. 1606년 선조가 55세라는 늦은 나이에 계비 인목왕후에게서 적장자 영창대군을 낳게 됩니다. 이때부터 선조는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생각을 하게 돼요. 하지만 쉽지는 않았죠. 영창대군과 광해군의 나이 차가 31살로 너무도 큰데다 광해군의 입지가 매우 강해졌으니까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광해군의 문안 인사도 받지 않는 등 따돌림을 시킵니다. 선조의 의도를 눈치챈 일부 관료들이 세자를 다시 책봉하자고 주장하면서, 조정이 둘러 나눠지게 됩니다.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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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이 왕으로 즉위한 만큼 대북파의 힘이 더 강했을 것 같아요.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소북파의 유영경이 영의정이 되면서 광해군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게 돼요. 그런 가운데 선조가 갑자기 죽어요. 유영경은 3살의 영창대군을 왕으로 즉위시키기 위해 인목왕후를 찾아가지만 거절당해요. 아무래도 인목왕후는 뒷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을 겁니다. 반면 광해군은 왕에 즉위한 후 선조가 영창대군을 보살펴달라는 일곱 명의 대신을 숙청하면서, 선조를 죽였다는 소문이 돌아요. 여기다가 명나라까지 광해군의 즉위에 태클을 겁니다.


명나라는 왜요?

명나라는 조선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놓고 움직이고 싶었어요. 그런데 임진왜란 과정에서 광해군의 능력이 특출남을 확인한 만큼, 성품과 능력이 부족한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을 왕위에 올리고 싶었죠. 그래서 광해군을 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면서 왕위에 오른 진상을 조사하겠다며 요동도사 엄일괴를 보내요. 광해군은 엄일괴에게 연신 뇌물을 주어 위기를 넘긴 다음, 임해군을 진도에 유배보내 죽이게 됩니다.


불안한 출발이었네요. 그렇다면 왕으로서의 능력은 어땠나요?

국정을 이끄는 측면에서는 잘했다는 평가가 높습니다. 대내적으로는 전쟁으로 다치고 굶주린 백성을 위해 허준에게 <동의보감>을 편찬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적극적인 지지를 해줍니다. 또한 경기도에서 대동법을 시행해요. 대동법의 핵심은 있는 사람이 세금을 많이 내고, 없는 사람은 적게 내는 데 있어요. 또한 토산물이 아닌 쌀과 돈으로 세금을 납부하도록 하여 상품화폐경제를 발달시키죠. 대동법이 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조선을 살렸다고 많은 사람이 이야기합니다. 물론 광해군이 대동법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지만, 광해군이 시작하지 않았다면 이후의 왕들은 대동법을 시행하지 않았을 겁니다.

대외적으로는 중립외교죠. 명나라와 누르하치의 후금이라는 거대한 두 국가의 경쟁에 최대한 참여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펼쳤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중립 외교 하니까 강홍립 장군이 떠오르는데요.

네. 맞습니다. 명나라는 후금의 세력이 더 커지기 전에 짓밟고자 대규모 원정군을 출병시킵니다. 이 과정에서 조선에도 원군을 보내라고 말하죠. 광해군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조선의 내부 사정과 더불어 누가 이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느 한쪽에만 베팅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죠. 그래서 강홍립 장군에게 상황을 보고 알아서 판단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강홍립 장군은 명나라 군대의 패배를 봤고, 직접 싸웠을 때 후금의 막강한 군사력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래서 후금에 항복한 후 조선이 원병을 보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죠. 후금도 강홍립의 이야기를 듣고 조선의 사정을 이해한다며 조선군을 모두 돌려보내 줍니다. 물론 강홍립 장군만 빼고요. 강홍립 장군 또한 일부러 후금에 남았는데, 그 이유는 후금의 정보를 조선에 알려주기 위해서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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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정치를 잘했는데 왜 쫓겨난 거죠?

정통성이 약하다는 데 가장 큰 원인이 있어요. 예전에 조와 종은 서열이 없다고 설명한 거 기억나시나요? 하지만, 광해군은 조가 종보다 낫다고 판단하고는 선종이라 부르려는 것을 선조로 바꾸었죠. 이 부분이 선조와 닮은 부분이죠.


광해군은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비정상적인 방법을 선택해요. 창덕궁에 좋지 않은 기운이 있다는 이유로 수도를 파주 교하로 옮기고자 했어요.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천도는 국가 운영에 큰 부담을 주는 만큼 반대가 심했죠. 그러자 인왕산 아래에 새로운 거처로 인경궁을 짓게 합니다. 이때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이 살던 집에 왕의 기운이 깃든 왕암이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다는 소문이 돌자 그 자리에 경덕궁을 지워요. 이것이 오늘날 가장 훼손이 심한 궁궐인 경희궁으로 서울역사박물관 옆에 있어요. 경희궁은 훼손이 너무 심해서 일부 전각만 복원해놓았어요. 그런데 훼손되지 않아서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왕암입니다.


궁궐 짓는데 큰 비용이 들고, 수많이 사람이 동원되는 만큼 반발도 크게 받았을 겁니다. 왕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벌인 공사가 역설적으로 광해군을 내쫓게 되죠. 자신에 대한 반발이 커지자 광해군은 9살의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보내 죽이죠. 인목대비는 오늘날 덕수궁에 유폐시키는 것도 모자라 폐위시켜버렸죠. 이 당시 인목대비가 얼마나 힘든 시기였는지 일기에 “사계절이 다 지나도록 햇나물을 얻어먹을 길이 없었는데, 가지와 참외 씨가 짐승이 똥에 들어있었다. 그것을 심어 나물 상을 차려 먹을 수 있었다.”라고 기록해요. 폐모살제 결국, 어머니를 유폐시키고, 동생을 죽였다는 이유로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은 쫓겨나게 됩니다.


이후 광해군은 강화도와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하다가 죽어요. 이 기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해 힘들어하는 백성을 보면서 광해군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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