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에서 6·25전쟁 당시 전사했던 군인들의 유해를 발굴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7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왜 유해를 다 찾지 못하는 걸까요?
저도 얼마 전 뉴스에서 서울 동작구의 한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6·25전쟁 당시 전사한 국군 유해 2구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굴삭기 작업을 하던 작업자들이 흙더미 속 낡은 군화가 뼛조각과 함께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을 발견하고 군에 신고했어요. 다행히도 발견한 작업자분들은 학창 시절 6·25전쟁을 역사 시간에 배운 것을 기억하고 있었고, 작업 직전에도 이곳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국방부는 즉시 공사 중단을 요청하고 현장에서 유해 2구와 각반 등 유품 7점을 수습해요. 이처럼 휴전선 부근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지역에서도 아직 발견되지 못한 전사자 유해가 많이 있어요.
그런데 휴전한 지 7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전사한 국군장병 유해를 수습하지 못한 것일까요? 우선 1950년 발발한 6·25전쟁이 매우 큰 전쟁이었다는 데 이유가 있어요. 남한과 북한만 싸운 전쟁이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유엔 회원국 16개국이 전투병력을 파견하고 5개 국가가 의료지원단을 보낼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국제전이었으니까요. 그만큼 전투가 치열하게 진행되면서 군인과 민간인을 합치면 약 190만 명, 전체인구의 26%가 전쟁으로 죽거나 부상을 입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쪽도 승리하지 못하면서 1953년 휴전선을 경계로 나누어진 채 오늘날까지 서로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군사적 대립을 하고 있어요. 두 번째는 6·25전쟁 이후 산업시설이 파괴되고, 농경지가 황폐해지면서 국민 대다수가 생계를 유지하는 것도 벅찼어요. 그러다 보니까 경제성장이 1순위가 되면서 안타깝게도 나라를 위해 희생한 국군장병의 유해를 찾는 일이 더디게 진행되었어요. 세 번째로 대한민국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많은 건물이 세워지는 등 국토가 변화되어 유해를 찾는 일이 매우 어려워진 것도 한 몫을 차지합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대한민국을 수호했던 국군장병 유해를 찾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이 모두에게 널리 공감되고 있다는 것이에요. 아파트나 산업시설 건설이 늦춰지는 일이 있더라도 나라를 희생한 분들의 유해를 찾아 기리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모두가 공감하고 있으니까요. 국민들의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6·25전쟁의 참상과 비극을 보여주는 동시에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어요. 혹시 1,100만 명이 넘게 본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를 휘날리며’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나요?
‘태극기를 휘날리며’를 아직 보지는 못했어요. 영화 내용을 들려주실 수 있나요?
그럼 영화 이야기도 하면서 6·25전쟁에 대해서도 알아볼까요. 우선 ‘태극기를 휘날리며’는 전쟁기념관에 있는 ‘형제의 상’과 관련된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여 제작됐어요. ‘형제의 상’은 황해도 평산군에서 살아가던 형 박규철과 동생 박용철의 이야기에요. 광복을 맞이하여 기뻐하던 두 형제는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소련군에 큰 충격을 받아요. 이제야 나라를 되찾고 행복하게 살아갈 것으로 생각하던 찰나 소련군이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는 모습에 실망과 두려움을 느낀 형 박규철은 월남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요? 두 형제는 원주시 치악고개에서 국군과 인민군으로 맞닥뜨리게 돼요. 형은 전장에서 만난 동생을 부둥켜안고 한참을 운 뒤, 동생을 귀순시켜 같은 부대에서 복무하며 대한민국을 수호해요.
하지만 영화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알려 다시는 끔찍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남과 북이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사실과 다르게 각색했어요. 그럼 본격적으로 영화 이야기해볼까요? 영화는 2004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발굴 도중 이름이 새겨진 만년필 유품을 발견하고 신원조회를 하는 데에서 시작해요. 만년필이 전사자의 유품이라고 생각한 것과는 달리 조회 결과 생존자가 동생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유해발굴감식단은 동생을 발굴 현장으로 부릅니다. 그렇게 발굴 현장에 도착한 동생은 웅크린 채 죽은 것으로 보이는 뼛조각을 보고 오열하며 과거를 회상해요.
화면이 바뀌고 광복 이후 일제의 수탈로 어려운 형편으로 살아가지만,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을 수 있는 나라에 살게 되었다는 현실에 두 형제는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두 형제처럼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면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활기에 차 있었어요. 하지만 한국의 상황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어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최대 5년간의 신탁통치 실시가 결의되면서 한국은 찬탁과 반탁으로 분열되었어요. 미국과 소련이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했지만, 아무런 해결책도 마련하지 못하고 결렬되고 말았죠. 결국 미국은 독자적으로 한국 문제를 유엔에 넘겼고, 유엔은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여 하나의 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의해요. 그러나 소련과 북한이 유엔 임시한국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하면서 1948년 남한만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돼요. 그러자 북한은 분단의 책임을 대한민국에 떠넘기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합니다.
이후 북한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무기와 병력을 지원받으며 전쟁을 일으킬 준비를 합니다. 반면 남한은 주둔하던 미군이 철수하고, 애치슨 선언으로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되죠. 이때가 기회라 생각한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남침하며 앞으로 다시는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전쟁 초기 부족한 병력과 무기로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면서 많은 사람이 자유와 안전을 찾아 피난길에 떠나게 됩니다. 영화 속 주인공 두 형제도 살아남기 위해 가족들과 밀양으로 피난을 떠나게 되죠.
하지만 대구에서 동생이 국군으로 강제징병 됩니다. 병력이 부족했던 국군은 어린 학생도 강제로 붙잡아 전쟁터로 내보냈거든요. 동생이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형은 같이 입대하여 전쟁터로 향하게 됩니다. 무공훈장을 받으면 동생을 제대시켜주겠다는 말에 형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인민군과 맞서 싸우며 전공을 쌓으며 북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때가 유엔이 북한의 침입으로부터 남한을 지켜야 한다며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이 참전하면서 전쟁의 양상이 바뀌던 순간이었거든요.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을 고립시키고 압록강까지 북진하는 데 성공하자, 많은 사람이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 생각했죠.
두 형제도 조만간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만날 수 있을 생각에 기뻐했어요. 그러나 이것도 잠시, 중공군이 전쟁에 참전하면서 남쪽으로 후퇴해야만 했어요. 미국이 한반도를 넘어 중국까지 공격할까 두려워진 중국이 대규모의 병력을 보내 북한을 도와주면서 국군과 미군은 눈물을 머금고 후퇴해야 했어요. 이것을 1·4후퇴라고 합니다. 추위와 전쟁으로 극한의 상황에 몰린 형이 친동생처럼 아끼던 인민군 포로를 죽이는 등 인간성을 잃어가면서 동생과의 갈등이 깊어집니다.
<다음 주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