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6.25전쟁 두 번째 이야기

by 유정호

다시 전열을 갖춘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에 성공하면서 서울을 되찾지만, 이후 어느 쪽도 우세를 점하지 못한 채 치열한 공방전만 벌이게 됩니다. 두 형제도 다시 수복한 서울에 들어오지만, 형의 약혼녀가 국민보도연맹 소속으로 인민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사살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국민보도연맹이란 이승만 정부가 좌익에 몸담았다가 전향한 사람을 가입시켜 만든 단체에요. 그러나 담당자들이 쌀을 주고 서명받는 방식으로 전향을 유도하며 실적을 올리면서 전쟁 때 수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좌익이란 이유로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희생됩니다. 두 형제도 약혼녀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죄명으로 죽는 것에 격분하여 반공청년단원과 싸우다 붙잡혀 갇히게 되죠. 그리고 얼마 후 북한군의 공격으로 형제는 헤어지게 돼요.


형은 국군에 의해 동생이 죽었다고 생각하고는 인민군이 되어 동생의 복수를 하게 됩니다. 부상을 입고 아무것도 모른 채 후방으로 이송된 동생은 인간성을 버린 형을 원망하고만 있었고요. 그러던 어느 날 군인들이 찾아와서는 인민군 영웅이 된 형의 사진을 보여주며, 동생의 사상을 의심하게 돼요. 동생은 우리 형은 민주주의, 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며, 형을 만나 귀순하도록 설득하겠다며 다시 전선으로 향해요. 그러나 전장에서 만난 형은 동생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이성을 잃어버려서 동생도 알아보지 못했죠. 동생이 울부짖으며 어머니에게 돌아가자고 호소한 끝에 비로소 형은 정신을 차리지만, 둘이 함께 되돌아갈 상황이 아니었죠. 형은 동생에게 만년필을 주면서 꼭 따라갈 테니 먼저 가라고 내친 다음, 인민군을 향해 총을 쏘며 동생이 달아날 시간을 벌어줍니다. 그리고 형은 인민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어요.


형의 도움으로 살아난 동생은 다시 전선을 향하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유엔군과 중국 그리고 북한이 휴전협정을 맺으며 전투가 멈추었기 때문이에요. 이때는 서울 수복 이후 전쟁을 통한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대한민국을 제외한 유엔, 중국, 북한이 1951년부터 2년여에 가까운 시간 동안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을 진행한 시기에요. 이승만 정부는 독자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등 휴전에 반대했지만, 미국이 경제원조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한 군사적 지원해준다는 약속에 동의하면서 1953년 7월 27일 한반도에서 총성이 멈추게 됩니다.


영화 내용을 듣고 나니 6·25전쟁이 다르게 느껴져요. 영화 두 형제처럼 아직도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이 많이 있겠죠.

우선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들은 평생을 괴로워했어요. 자신의 곁에서 체온을 나누며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이 싸늘하게 죽어있는 모습을 보는 일이란 정말 괴롭고 힘든 일이었을 거예요. 더욱이 얼마 전까지 일제의 억압에 맞서 함께 싸우던 동포들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죽이며 미워하는 일이 일어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특히 내 가족과 헤어지는 것을 넘어 죽게 만든 상대방을 평생 미워할 수밖에 없었겠죠. 또는 너무도 선량했던 사람이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피폐해져 망가져 버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힘들었을 겁니다.


이럴 때일수록 가족이 함께한다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겠죠. 그러나 생사도 모른 채 만나지 못하는 이산가족이 약 1천만 명이나 되었어요. 대한민국은 이들의 만남을 위해 1983년 KBS에서 453시간 45분 동안 이산가족 만남을 위해 세계에서 가장 긴 생방송을 진행해요. 처음에는 95분으로 기획했는데, 1·4후퇴 때 부산에서 헤어진 사촌 남매 8명을 만난 신영숙씨가 방송되면서 많은 이산가족이 가족을 찾아달라고 부탁했어요. 차마 방송을 중단할 수 없던 KBS는 138일 동안 생방송을 이어가면서 5만 3,536건의 이산가족 사연을 소개했고, 이 중 1만 189건의 상봉이 이루어집니다. 세계인들도 이 방송을 통해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피해를 주는지 알게 되었죠. 그래서 세계 언론인대회에서 ‘1983년도의 가장 인도적인 프로그램’, 세계평화협력회의에서는 방송 기관으로는 최초로 ‘골드 머큐리에드 오서램상’을 수여합니다. 그리고 2015년 10월 9일에는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됩니다.


남과 북도 이산가족을 위한 만남을 위한 노력을 계속 펼지고 있어요. 1985년 광복 40주년을 맞이하여 남한 이산가족 35가구가 평양에서, 북한 이산가족 30가구가 서울에서 오랫동안 떨어진 가족과 3박 4일을 함께 했어요. 이런 노력은 남북한이 불편한 관계를 유지할 때 중단되기도 했지만 계속 이어졌어요.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을 방문해서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이산가족 상봉을 이루어냅니다. 이런 노력의 결과 남북 총 4,742가족(23,676명)이 만나요. 또한 이산가족 찾기를 희망하는 신청자를 받아 2016년 기준 13만 1천여 명을 등록하고 만남을 추진하고 있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분들에게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요. 너무도 오랜 시간이 흘러 절반 이상이 그토록 보고 싶었던 가족을 만나지 못한 채 돌아가시고 있거든요.


요즘 안타깝게도 통일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어요. 분단된 지 80년이 넘으면서 남과 북이 하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 적어진 것도 하나의 이유지만, 서로를 비난하며 적으로 돌려버린 역사도 큰 몫을 차지합니다. 남북한이 서로를 미워했던 시간도 있었지만, 분단으로 인해서 고통받고 신음하는 분들을 생각한다면 빠른 시일에 통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전쟁을 멈춘 상태여서 늘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멈추고,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도 통일이 꼭 필요하답니다. 이 외에도 통일을 해야 하는 이유가 너무도 많이 있을 거예요. 여러분도 우리가 통일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어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6.25전쟁 첫 번째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