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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묻고 답하기 1부

by 유정호

선조는 어떤 왕인가요?

많은 사람이 조선에서 가장 무능력하고 비열한 국왕을 뽑을 때 인조와 함께 늘 1, 2위를 놓고 다투는 인물입니다. 선조와 인조 모두 큰 외침을 받았기에 아무리 잘했어도 비난이 없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선조와 인조는 그걸 넘어 인격적으로 부족함이 컸습니다. 우선 선조가 왕이 되었던 과정을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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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명종의 아들이 아닌가요?

명종은 왕위를 계승할 순회세자를 낳았지만, 오래 살지 못하고 13살에 죽어버립니다. 더욱이 명종 자신도 3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으면서 다음 왕으로 즉위할 후계자가 없었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방계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선조가 왕으로 즉위합니다.


방계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방계라는 것은 형제, 자매, 조카를 말해요. 원칙적으로 왕위는 직계 자손이 이어가야 했지만,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할 사람이 없어서 중종의 아들 중에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이 왕이 되어요. 이 과정에서 하성군 즉 선조가 왕이 될 만한 자격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명종이 하루는 덕흥군의 세 아들 하원군, 하릉군, 하성군을 궁에 불러 자신이 쓰고 있던 익선관을 내주며 써보라고 합니다. 모두가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 할 때, 명종은 “너희들의 머리가 얼마나 큰지 보려는 거니까 써 봐도 괜찮단다.”라고 말하죠. 그제서야 하원군과 하릉군은 익선관을 써요. 그런데 하성군은 “임금이 쓰는 것을 어찌 신하가 쓸 수 있습니까?”라며 거절해요. 명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임금과 아버지 중 누가 중요한지 물어요. 이때 하성군은 “임금과 아버지는 같지 않지만, 충효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라고 말하죠.

이것만 보면 선조는 어려서 자기 분수를 알고, 현명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명종이 하성군을 후계자로 선택했다는 착각을 주게 하죠.


명종이 선조를 선택하지 않았나요?

명종이 병으로 쓰러지자, 영의정 이준경이 조카 중에 누구를 후계자로 삼을지를 물어봐요. 이때 명종은 대답하지 않아요. 2년 뒤에도 명종의 병이 위독해지자, 이준경은 왕비 인순왕후를 찾아가 누구를 왕으로 할지를 물어봐요. 이때 인순왕후가 하성군을 다음 왕으로 선택하죠. 이준경은 명종을 찾아가 하성군을 다음 왕으로 선택하겠다고 아뢰지만, 명종은 대답하지 못하고 죽어요.

명종의 대답은 없었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관리들은 선조를 찾아가 왕이 되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때 선조는 모친상을 치러야 하며, 자신은 왕이 될 능력이 없다고 거절하죠. 그러나 신하들이 계속 요구하자 그제서야 왕으로 즉위합니다.


선조는 세자 수업을 받지 못했겠네요.

그래서 당대는 물론 오늘날까지 유명한 이황과 이이가 선조에게 국왕으로 지녀야 할 덕목과 자세를 책으로 엮어 올립니다. 이황은 유학의 핵심을 열 개의 도표로 제시한 뒤 경서와 여러 성현의 글로 설명하며 군주 스스로 성학을 따를 것을 제시하는 성학십도를 올려요. 이이는 사서 육경의 도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자기 생각을 덧붙이면서 현명한 신하가 군주에게 성학을 가르쳐 기질을 바꿔야 한다는 내용의 성학집요를 올립니다.


그런 노력이 있었는데도 선조는 성군이 되지 못했네요.

이황과 이이만이 아니죠. 우리가 조선 시대를 떠올렸을 때 많이 접해 본 인물들이 대부분 선조 때 살아갔던 분들이 많아요. 정말 많은 인재가 있었음에도 선조는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죠. 저는 이 부분을 선조의 자격지심 때문에 생겨났다고 봐요. 자신보다 더 뛰어난 인물에게 질투를 많이 보이고, 방계출신이라는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관료 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자신이 마지막에 해결하는 듯한 모습을 계속 보여요. 그러다가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면 책임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죠.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우선 정여립의 난을 볼까요. 정여립은 24살에 홍문관 수찬에 오르며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았던 인재였어요. 이이와 성혼도 정여립을 좋게 보며 여러모로 도와주었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이와 성혼을 비판하고는 관직을 버리고 전라도 진안으로 내려가요. 이곳에서 대동계를 조직하고는 신분에 상관없이 능력 있는 사람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여요. 그렇다 보니 1587년 관군이 진압하지 못한 왜구를 대동계가 물리치며 백성들의 환호를 받게 됩니다.

왕도 해결하지 못한 일을 일개 선비가 해낸 모습이 싫어서였을까요? 2년 뒤 전라도가 아닌 황해도 관찰사 허준과 안악 군수 이축이 대동계가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한양으로 진격하여 정권을 잡으려 한다며 정여립을 역모죄로 고발하는 일이 벌어져요. 선조는 즉시 의금부 도사를 파견했고, 정여립은 이를 피해 진안 죽도로 도망치다 자결합니다. 그렇다 보니 정여립이 진짜로 역모를 꾸몄는지 아무도 알 수 없게 되었죠. 그런데도 선조는 정여립의 아들을 고문하여 역모죄를 자백받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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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선조는 이 기회를 이용해 신하들을 길들이기 위해 서인 출신의 정철을 시켜 3년 동안 국문을 이어가요. 이 과정에서 구체적 증언이나 물증 없이 동인 천여 명이 죽어요. 우리가 앞서 사림들이 억울하게 죽어간 사화를 이야기했잖아요. 정여립의 난으로 죽은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임진왜란 초기 속수무책 당한 원인 중 하나가 정여립의 난 때 너무 많은 인재가 죽어갔기 때문이라고요.


또 다른 사례가 있을까요?

다음 시간에 이야기할 임진왜란과 관련된 일을 조금만 미리 앞당겨 이야기해볼까요? 일본이 정유재란을 일으키기 전 이순신을 제거하려고 부산으로 가토 기요마사가 오고 있으니 바다에서 급습하면 쉽게 이길 수 있다는 가짜 정보를 흘려요. 현장을 모르는 선조는 출정하라고 명령했고, 이순신은 함정이라며 명령을 거부하다가 백의종군하게 되죠. 이순신이 하지 못하는 일을 자신이 할 수 있다며 삼도수군통제사를 맡은 원균도 막상 와보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선조의 거듭되는 명령에 출전했다가 칠천량해전에서 몰살되고 말지요. 이때 선조는 이렇게 말해요. “하늘의 뜻이다.”

이후 이순신이 무너진 수군을 재정비하여 울돌목에서 12척의 배로 일본 수군을 상대로 명량대첩이라는 큰 승리를 거두자 선조는 이렇게 말하죠. “하늘의 뜻이다.” 분명 똑같이 하늘이 두 번 나오는데 의미가 정반대이죠. 칠천량해전의 패배는 선조 자기 잘못이 아니었음을 의미하고, 명량대첩의 하늘은 이순신이 운이 좋아 승리했다는 의미죠. 또한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분전하다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밤이 늦었다.”라며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아요.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선조의 사람됨이 어떠한지를 짐작해 볼 수 있네요. 다음 시간에는 임진왜란 이야기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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