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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묻고 답하기 첫 번째

by 유정호

영조는 조선 시대 가장 오랜 기간 재위했던 왕이죠?

경종 1년에 왕세제로 책봉되고, 3년 뒤인 1724년 국왕으로 즉위한 후 52년 동안 조선을 이끈 왕입니다. 83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정말 많은 일들이 벌어졌어요. 학창 시절 많이 들어 본 탕평책 시행부터 청계천 준설 등 많은 업적을 이루어냈고, 말년에는 아들 사도세자를 죽이기도 하는 비극도 겪은 왕이지요.


저번 시간 경종을 죽였다는 오해를 받았다고 했잖아요. 그만큼 영조도 순탄하게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을 것 같아요.

영조를 힘들게 한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이인좌의 난이에요. 경종이 갑자기 죽으면서 소론의 입지가 매우 좁아지게 되자, 이들은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고자 역모를 준비하게 돼요. 경종비의 오라버니 박필현을 중심으로 소론과 남인 일부가 세력을 규합했는데, 이 중에는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후손이면서 남인 명문가였던 이인좌와 그의 형제들이 있어요.


이들은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 이탄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결정하고 몇 년 동안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준비합니다. 유민과 도적들에게 돈을 주어 은밀하게 군대를 조직했죠. 이것은 훗날 역모를 꾀하는 사람들이 병력을 모으는 방법으로 활용됩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거사가 시작되면 이인좌가 남쪽에서, 평안부사 이사성이 북쪽에서 군대를 끌고 한양으로 진격하면, 금군별장 남태징이 성문을 열기로 했어요. 하지만, 영조가 소론을 다시 등용하자, 이들은 역모를 일으킬 명분이 사라졌어요. 그 결과 역모에 가담한 사람들의 이탈이 많아졌어요. 조급해진 이들은 준비가 덜 된 상황에서 이인좌를 대원수로 삼고 한양으로 군대를 이끌고 올라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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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가 영조가 즉위한 지 4년이 되는 해였다면서요. 영조는 어떻게 대응했나요?

이인좌와 합류하기로 했던 박필현이 죽도에서, 박필몽은 상주에서 체포되어 처형돼요. 영남에서는 정희량이 안음·거창·합천·함양 4개 군을 점령했지만, 경상도 관찰사에 토벌되고 말죠. 그래도 이인좌는 청주성을 함락하며 한양으로 진격했어요. 하지만 병조판서 오명항이 이끄는 토벌군에 대패하면서 실패하고 말아요. 영조는 승전 소식이 얼마나 좋았는지 숭례문까지 나가 난을 진압하고 돌아오는 군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영조가 멋진 것이 난을 일으켰던 소론과 남인을 탄압하기보다는 그들을 품에 끌어안아요. 이것이 붕당의 순기능을 강화하는 탕평책이죠. 영조는 붕당 간에 서로 다투지 말고 화합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탕평채라는 음식도 만들어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탕평채요?

탕평채는 청포묵에 달걀, 미나리, 소고기, 김 등을 얹어 버무린 음식이에요. 생각보다 만들기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여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어느 날 영조는 관료들과 탕평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식사하자며 탕평채를 올려요. 이때 탕평채에 들어가는 재료인 미나리는 동인, 소고기는 남인, 김은 북인, 청포묵은 서인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재료가 서로 잘 어우러져야 맛난 음식이 되는 것처럼 서로 화합할 것을 요구한 거죠.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인이 정국 주도권을 가지고 있어서, 탕평채의 주재료가 청포묵이라고도 합니다.


영조는 그럼 어떤 업적을 쌓았나요?

제일 잘 알려진 것은 균역법이 아닐까요. 중종 이후 군인으로 복무하는 대신 포를 병조에 납부하는 군적수포법이 시행되었어요. 그럼 병조는 거둬들인 포를 각 관아에 분배하여 군사를 모집하도록 했죠.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만들어지는 군영들이 국가의 필요에 의해 체계적으로 만들어지기보다는 당파의 이익에 우선하여 만들어지다 보니 문제가 생겼어요. 군영마다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이미 군역을 진 사람에게 또다시 포를 징수하면서, 이중 삼중으로 포를 납부하는 일이 벌어졌죠. 더 나아가 군영마다 거두는 군포의 양도 일정하지 않았고요. 더욱이 양반은 공부한다는 이유로 군역을 지지 않았으니, 일반 백성들의 고충은 말도 하지 못할 정도로 컸어요.


그래서 영조는 연간 2필을 내던 것을 1필로 줄여주는 균역법을 시행합니다. 문제는 세금이 줄었다고, 국가 살림을 줄일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부족한 세수를 메꾸기 위해 왕실 재산이던 어염선세를 내놓고, 지주에게 토지 1결당 쌀 2두를 부과하는 결작미를 거둬요. 부유한 사람들을 선무군관으로 편성해 포를 거둬들이기도 하고요. 또한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누락된 토지를 찾아내 세금을 거두죠. 왕실부터 나라를 위해 이익을 포기하는 모습에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죠.


이 외에도 어떤 업적들이 있나요?

영조는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여 행복한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했어요. 예를 들어 왕으로 즉위한 해 깨진 사기 조각 위에 죄인의 무릎을 꿇린 뒤 무거운 돌을 얹어 벌을 주던 압슬형을 폐지하고, 죽은 자의 죄는 다시 밝히지 못하게 하는 등 가혹한 형벌을 폐지했어요. 또한 사형을 선고하기 전에 초심, 재심, 삼심을 거치게 하는 삼복법을 시행하여 억울한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했어요. 이런 기조는 계속 이어져서 영조는 재위 50년에도 개인이 사사로이 형벌을 주거나, 판결 없이 함부로 벌을 내리지 못하도록 했어요. 죄인임을 표시하는 문신을 얼굴에 새기지 못하게 하여 죽을 때까지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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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현명한 왕이었네요. 지금으로 따지면 처벌받은 사람이 같은 죄로 다시 처벌받지 못하도록 하는 일사부재리를 시행한 거네요.

이것만이 아니에요. 서울을 관통하는 청계천이 세종 이후 오래도록 정비되지 않아서 홍수에 쓸려온 퇴적물과 사람들이 버린 오물로 가득 차 있었죠. 청계천의 바닥이 평지와 같았다고 하니 얼마나 심했는지 알겠죠. 조금만 비가 오면 청계천이 범람하면서 큰 피해를 주자, 영조는 19번의 공청회를 통해 백성들의 의견을 들어요. 그리고는 “백성을 위해 청계천 준천을 하는 것이 옳지만 불편한 마음을 가진 이가 있다면 억지로 따르지 말라.”라고 말해요. 이 말에 감동한 1만여 명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공사에 참여합니다. 여기서 영조가 많은 의견을 수렴하여 정책을 결정하는 신중한 모습과 함께 백성을 아끼는 모습을 볼 수 있죠.


두 달여 동안 벌어진 청계천 준설공사에 주변 백성 15만 명, 고용 인력 5만 명, 자원봉사 1만 명, 총 21만 명이 동원되었어요. 이때 실업자들에게 품삯을 주어 일자리를 제공하여 경제활동을 활성화했고, 청계천 주변에 살던 백성에게는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살 수 있는 집값을 보상해주었어요. 이렇게 쓰인 돈이 3만 5천 냥에 쌀 2,300여 석이었어요.


이 기간 영조는 청계천 공사 현장에도 자주 나갔어요. 하루는 거센 비바람이 불어오자 많은 신하가 자리를 옮기자고 했지만, 영조는 허락하지 않았죠. 그러나 관리들이 허투루 일하는 일이 없었을 겁니다. 또한 공사 기간 양난 때 죽은 많은 유골이 나오자, 좋은 자리에 묻어주고 제사를 지내 영혼을 위로해주도록 합니다.


오늘날 광통교를 가보면 ‘경진지평’이라고 적힌 기둥을 볼 수 있어요. 이것은 영조가 후대 왕들에게 이 네 글자 중 하나라도 보이지 않으면 준천하라는 뜻으로 새겨놓은 거예요. 나라를 경영하는 사람은 이래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들게 합니다. 이 외에도 서얼도 관직에 나갈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일본에 통신사로 갔던 조엄이 가져온 고구마를 구황작물로 활용하여 백성이 굶지 않도록 합니다.


정말 엄청난데요.

영조의 업적을 말하다 보니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하지도 못했네요. 다음 시간에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하여 말씀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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