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중명전에서 벌어진 비극 1/2

by 유정호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돌아오면서 조선을 열강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주국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어요. 우선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고 대내외에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나라 이름을 바뀌었다고 선포했어요. 그리고는 상공업을 진흥하는 등 여러 개혁을 펼쳤어요. 하지만 황제권을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둔 개혁이어서 대한제국의 국력이 강해지지 못했어요. 오히려 일본과 러시아의 침탈을 더욱 많이 받았어요.


일본은 러시아를 제치고 대한제국을 독차지하기 위해 영국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어요. 영국도 일본을 돕는 것이 아시아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도움이 될것으로 판단하고 영일동맹을 수락했어요. 이제 무서운 것 없는 일본은 1904년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어요. 일본은 전쟁 중에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아도 된다는 약속을 받아냅니다. 그 뒤 전쟁의 승패가 충분히 예상되지 않나요?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하면서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 준비를 하게 됩니다.


일왕의 특사 자격으로 조선에 건너온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외교권을 넘기고, 식민지를 만드는데 필요한 통감부를 설치하라고 협박했어요. 지금까지 일본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던 고종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습니다. 외교권을 빼앗긴다는 것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빼앗기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았으니까요.


외교권 박탈이 왜 나라를 빼앗기는 것과 같은지 잘 이해되지 않죠? 이렇게 생각해볼까요. A라는 친구가 나에게 100만 원을 빌려달래요. 나는 빌려주기 싫은데, B라는 친구가 대뜸 제 대변자라면서 제가 돈을 빌려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네요. 그리고는 저에게 100만 원을 A에게 주래요. 이때 내가 B 친구의 말을 거부하지 못하고 100만 원을 A에게 준다면, 저는 친구들과 대등한 관계로 볼 수 있을까요? 이 사례와 똑같지는 않겠지만 외교권을 빼앗긴다는 것은 대한제국이 어떤 의사결정도 하지못하고, 일본 결정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해요. 이것은 식민지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에요.


이런 사실을 너무도 잘 아는 고종은 외교권을 넘긴다는 조약문에 절대로 서명할 수 없다고 강한 어조로 말했어요. 그리고는 이토 히로부미와의 만남을 끝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궁궐에서 내쫓겼지만 포기할 마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협상 상대를 바꾸어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손탁호텔과 일본공사관으로 불러 외교권을 넘기는 데 동참하라고 강요했어요. 이 자리에 모인 대한제국 대신들은 고종이 허락하지 않는 한 동의할 수 없다며 한목소리를 냈습니다.


대화로는 외교권을 빼앗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토 히로부미는 예전처럼 무력을 동원하여 조선 정부를 겁주기로 마음먹었어요. 1905년 10월 17일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에게 덕수궁을 포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때 하세가와가 기병 800명, 포병 5,000명, 보병 20,000명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결과 덕수궁에는 어떤 누구도 들어가거나 나올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고종과 대신들은 과거 일본군이 저질렀던 일들이 떠올랐어요. 동학농민운동 때 일본군이 경복궁을 에워싸고 고종을 겁박해서 농민군을 진압했던 순간을 말입니다. 고종은 사태가 매우 심각해지자,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지 않고 회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자신을 다시 찾아온 이토 히로부미에게 인후염으로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다는 거짓말했어요.


고종이 자신과 만나기를 거부하자, 이토 히로부미는 국정과제를 결정할 수 있는 8명의 대신을 덕수궁 내 왕실도서관이었던 중명전으로 모이게 했어요. 그리고는 총칼로 중무장한 일본군을 배치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어요. 모두가 겁에 질려 서로의 눈치를 보자 의정부참정대신 한규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일본군의 무례한 태도를 꾸짖었어요.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군을 혼낸 한규설은 어떤 인물일까요? 한규설(1848~1930)은 무과에 급제하여 28살에 진주병사에 임명될 정도로 뛰어난 무인이었어요. 평생을 누구보다 강단 있는 모습으로 불의를 보면 참지 않고, 잘못을 지적하는 모습에 많은 사람이 한규설의 인품을 칭찬했습니다. 한규설이 올바른 일이라면 한 치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던 사례가 유길준을 도와 「서유견문」을 완성한 일입니다. 당시 한규설은 갑신정변으로 연금된 유길준은 감시하는 책임자였어요. 이때 한규설은 서양 문물을 수용하여 조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유길준의 의견에 깊이 공감했어요. 그래서 역적을 도와준 죄로 문초를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유길준이 서양의 선진 문물을 접하며 느낀 것을 책으로 엮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어요.


늘 공명정대했던 한규설은 1896년에는 법부대신 겸 고등재판소 재판장이 되었어요. 권력자들의 부정·비리로 피해를 보는 사람이 없도록 말이에요. 이런 모습에 독립협회는 중추원국민 의사가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의회제도 의장으로 한규설을 임명했어요. 그러나 고종이 독립협회를 강제로 해산하면서 한규설은 관직에서 쫓겨나야만 했어요. 다행히도 한규설을 대체할 사람이 없자, 고종은 한규설을 다시 법부 대신으로 임명하고, 을사늑약이 맺어지는 당시에는 의정부참정대신으로 임명하여 국정을 이끌게 했어요.


다시 1905년 중명전으로 돌아갈게요. 평생을 국민과 나라를 위해 살아온 한규설로서는 중명전에서 벌어지는 일본의 무례하고 도리를 모르는 행동에 분개했어요. 자신을 제재하는 일본군을 힘으로 밀어제친 한규설은 고종을 만나러 회의장을 빠져나갔어요. 회의장에 남아있던 대신들은 분을 참지 못하고 성큼성큼 걸어 나간 한규설이 돌아오지 않자, 일본군에게 죽었다고 생각하고 벌벌 떨었어요. 사실 한규설은 골방에 감금되어 있었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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