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중명전에서 벌어진 비극 2/2

by 유정호

회의장에는 을사오적이라 불리는 이완용(1858~1926)도 있었어요. 그는 경기도 광주의 가난한 양반으로 태어났지만, 흥선대원군과 친분이 있던 먼 친척 집으로 입양되면서 충분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완용은 25살에 과거에 급제했을 당시만 해도 서구문물을 받아들이지 말자고 주장하는 수구파였어요.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과 수교를 맺은 이후에는 태도를 바꿔요. 이때부터 이완용은 시류시대의 흐름이나 경향 에 편승하여 자신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 특기가 됩니다.


이완용은 1887년 서구문물을 수용하기 위해 젊은 영재를 육성하고자 만든 육영공원한국 최초의 근대식 공립교육기관에 입학했습니다. 이곳에서 헐버트를 비롯한 외국인에게 근대식 교육을 받으며 능력을 인정받은 이완용은 주미참찬관으로 임명되어 미국에 1년여간 머물면서 서구문물을 배웠어요. 이후에는 임시대리공사로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이완용은 미국을 가장 잘 아는 관료로 인정받게 돼요. 미국과의 관계가 중요했던 만큼 이완용은 형조참판, 이조참판 등 주요 요직에 임용되어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을미사변민비가 일본 낭인에게 시해당한 사건 이후 이완용은 친일정권에 감금된 고종을 경복궁에서 빼내어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려는 춘생문 사건을 일으키나 실패하고 말아요. 하지만 얼마 뒤 러시아 공사관으로 고종을 피신시키는 아관파천을 성공시키며 주요 직책을 독차지하게 됩니다. 무려 외부·학부·군부대신 등 5개 직책을 동시에 가졌어요. 그래도 이때까지는 이완용이 나라를 배신하지는 않았습니다.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고종이 덕수궁으로 환궁하는 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런 노력이 인정되어 1898년에는 독립협회 회장으로 선임되기까지 했어요.


하지만 이완용은 고종이 싫어하는 독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한 대가로 전북관찰사로 전임되는 등 여러 불이익을 받게 돼요. 또한, 각종 이권을 열강에 넘겨준 책임을 물어 독립협회에서도 쫓겨나게 됩니다. 여기에 양아버지 이호준이 죽으면서 큰 충격을 받은 이완용은 그전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전북 관찰사로 있으면서 직무 태만으로 감봉 처분을 당하고, 백성들의 재산을 빼돌려 파면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해요.


그런 이완용에게 러일전쟁은 중앙 정계로 돌아갈 기회로 주었어요. 이완용은 친일파가 되어 일본에 적극 협력한 대가로 학부대신이 되었어요. 사실 이완용은 중명전 회의장에 갇힌 순간 누구보다 먼저 을사늑약에 찬성표를 던져 이토 히로부미의 눈에 들고 싶었어요. 하지만, 나라를 팔아버린 첫 번째 사람으로 역사에 기록되기는 싫어서 주변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회의장을 빠져나간 한규설이 돌아오지 않는 모습에 어려 대신들이 흔들리자 이완용은 결심을 굳히게 돼요. “무조건 반대한다면 여기서 살아나갈 수 없다. 그렇다면 누구보다 먼저 찬성표를 던저 이토 히로부미의 눈도장을 확실하게 받자.”라고 말입니다.



이완용이 을사늑약에 찬성표를 던지자, 그동안 눈치를 보던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도 곧바로 찬성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완용과 뒤이어 찬성한 네 사람을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이라고 불러요.

이토 히로부미는 8명 중 5명이 찬성했으니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조약이 성립했다며, 외부대신의 직인을 빼앗아 날인도장을 찍음해버렸어요. 무려 14시간 동안 감금하여 협박한 끝에 얻어낸 결과물이었습니다. 참으로 어이없고 가슴 아픈 역사적 비극의 순간이라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이후 대한제국은 강압으로 맺어진 을사늑약은 무효임을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이상설·이위종 세 명의 특사를 보내요. 하지만 일제의 방해와 열강들의 외면으로 실패하게 됩니다. 오히려 이 일로 인해 고종은 강제 퇴위당하게 됩니다.



한규설은 을사늑약 이후 중추원 고문 겸 궁내부 특진관이 되었어요. 사실 한규설도 민영환이 자결하고, 수많은 관료가 관직을 버리고 나가는 모습을 보며 따라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누군가는 조정에 남아 일제의 침략을 끝까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반면 일제는 한규설을 친일파로 만든다면 한국을 통치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남작의 작위를 내렸어요. 하지만 한규설은 일본이 주는 작위에 감격하며 더 큰 충성을 맹세했던 을사오적과는 달리 남작 작위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가 일제에 협력할 의사가 없음을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일제가 자신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하는 가운데 3·1운동이 일어나자 한규설은 나라의 힘을 키우는데 앞장섰어요. 애국심이 투철하고 능력 있는 젊은이를 키우는 것만이 나라를 되찾는 일이라 생각한 한규설은 청년조선교육회를 창립합니다.


반면 이완용은 을사늑약 이후 노골적으로 일제에 협력하여 대한제국이 식민지로 전락하는 데 앞장섭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영원한 스승’으로 떠받들며 가장 높은 관직인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켜버려요. 차관정치와 군대해산을 다룬 한일신협약(정미7조약)도 추진하고, 사법권을 일본에 넘기는데 동의하는 서명까지 합니다. 이외에도 끊임없이 일제에 나라를 팔아버리는 행위를 일삼자, 이재명 의사가 이완용을 죽이고자 했어요.


이재명 의사의 칼을 맞고 나서도 이완용은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어요. 1910년 제3대 통감으로 부임한 데라우치와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고, 순종 황제를 겁박하여 합병 조칙을 받아냅니다. 이로써 500여 년을 이어오던 조선은 사라지고 맙니다. 이후 많은 사람이 일제의 억압과 수탈에 힘들어하는 모습에도 이완용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부와 권력을 채우는 데만 급급했어요. 일본 정부로부터 백작에 이어 후작 지위를 받은 이완용은 3·1만세운동을 망동이라며 비난하기까지 했어요. 그렇게 못된 짓을 일삼던 이완용은 이재명 의사의 칼에 맞았던 후유증으로 1926년에 죽어요.


일본의 강요에 다른 행동을 보인 한규설과 이완용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나요? 이완용은 살아있으면서 스스로는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그 당시와 현재까지도 이완용을 대단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을까요? 모두가 이완용의 행동을 비난하며 절대로 저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옛말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말이 있죠. 한규설과 이완용을 통해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가 명확해지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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