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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산적자 Apr 30. 2019

조직에 몸 담고 있는 당신이 봐야 할 글

명분이 없다 아입니까



<어느 날, 회사>


이대리, 이건 뭘 근거로 작성했지?

이건 SAP(ERP 시스템) 실적을 참고 했습니다.


그럼 이 예상치는?

이건 데이터가 없어서 대충 때려 넣었습니다.


대충 때려 넣어도 근거가 있어야지.

오더 예측은 실제 사용량과 20~30%까지 차이 나는데 그걸 근거로 해야 합니까?


그래도 회의 자료를 기준으로 삼아야지

그렇게 하면 계속 실제 사용량보다 발주가 더 나가게 됩니다. 재고는 어떻게 합니까?


그래도 그냥 때려 맞춘다고 할 순 없잖아.

누구한테 말입니까?


알잖아. (You Know Who)

설명 하시면 되는 걸 갖고 안 맞는 데이터로 발주 내면 재고는 우리가 부담해야 하는데 현장의 고충도 이해해주십시오.


그래도 근거가 있어야 된다. 회의 자료 기준으로 가자.

하... 알겠습니다. (전투력 상실)







<전설의 칼, 그래도>


대화를 보신 분들은 '그래도'라는 칼이 있는지 궁금하실 것이다. 신입 사원의 아이콘 <미생>의 장그래가 생각나기도 한다. 아더왕의 전설이 생각나기도 한다. 회사 지하에 이런 이름의 칼이 꽂혀 있진 않을런지. 이런 답답함을 대화에 나오는 이 대리만 느끼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대한민국 회사원 모두가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나에겐 합리라는 것의 기준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공간이 회사였다. 나와 팀장의 합리는 그 기준이 다른지도, 혹은 생각하는 합리의 개념이 다른지도 몰랐다.







<명분의 공간>


회사는 명분의 공간이다. 보고서의 모든 데이터는 근거를 가져야 한다. 대부분은 회사 시스템에서 나올 때가 많다. 하지만 실적은 후행 데이터이기 때문에, 예상치는 우리의 앞에 있는 부서(주로 영업부서)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 예측이 맞지 않아도 공식 회의에서 발표한 자료이기 때문에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게 팀장의 입장이다. 


이대리는 이런 팀장의 결정에 맨날 맞지도 않는 데이터를 따라가야 하느냐고 불만을 표출한다. 차라리 과거 데이터를 기반으로 발주량을 조절하는 것도 고려해볼 수 있겠다. 하지만 보고할 때 설명이 복잡해지기 때문에 팀장은 그렇게까진 하지 않는다. 관리를 그렇게 좋아하는 양반이 그런 일은 하지 않겠다니, 볼드모트(You Know Who)를 만나서 설명하기 싫어하는 스타일이 업무에 그대로 반영되는 듯 하다.


이런 근거에 대한 필요는 보고에 한정되지 않는다. 사소하게 일어나는 모든 결정에도 근거가 있어야 한다. 출장을 가더라도 각종 출장 관리 규정에 따라 숙박비, 교통비, 일당이 결정된다. 그리고 심지어 몇 시간 이상 비행을 할 경우에 임원진은 비즈니스 클래스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는 규정도 있다. 모든 것이 규정과 전결 기준을 따라가는 곳이 회사다. 모든 것에 명분이 있는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규정이 주는 자유>


회사라는 곳에서 오래 살아남으려면 일도 잘해야겠지만 이런 규정을 잘 파악하고 있는 것도 중요하다. 규정으로 애매한 영역을 지워나가는 게 회사다. 그만큼 광범위한 분야에서 지켜야 할 규정이 많다. 답답하기도 때론 불합리하다고 생각될 때가 많다. 하지만 이렇게 명시된 규정이 있다는 건 회사라는 사회 안에서 살아갈 때 오히려 편할 수도 있다. 인간은 규칙 안에서 자율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이지 않는가?


명시적 규정에 따라 사는 것이 답답하게 생각되는 사람은 회사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대리가 아마 그럴 것 같다) 근거 없이 작성한 서류나 의사 결정은 어떻게든 보고의 과정이나 미래에라도 재조사의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품의 올릴 때도 참고한 모든 기준에 대해서 근거를 적어놓는 게 중요하다. 회사에서 보낸 시간이 늘어날수록 어떤 기준을 근거로 삼아야 할지 눈에 잘 들어온다. 하지만 그 근거의 기준에 대한 합리성은 개인마다 차이가 난다. 비합리적인 팀장의 기준 설정은 비합리적이면서도 합리적이다.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나는 게 회사가 아닐까? 이해할 순 없지만 명분은 갖추고 있는 의사 결정이 일어나는 곳이 회사라는 공간이다.







<존재의 이유>


오늘도 명분을 찾는다. 다른 이들도 나에게서 혹은 내가 만든 문서에서 명분을 찾는다. 그리고 '이 사람이 이렇게 문서를 만든 근거가 뭔지 고민하다 물어본다' 나의 일은 상사에게 제대로 된 명분을 쥐어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제대로 된이라는 단어는 상사의 합리라는 관점에 부합하는 단어이다) 관리자 층이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논리적 완결성을 갖춘 명분을 주는 일, 그들의 상사에게 털리지 않을 근거를 제공해주는 일이 회사라는 공간에서 우리의 존재 이유이지 않을까?





이대리가 수정한 자료를 보던 팀장님,

이건 또 어디서 나온거야, 이대리 이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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