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 봐도 괜찮을 철학적 SF 액션 영화
매트릭스 재감상
고등학생 때 보고 나서 다시 보게된 매트릭스, 이것도 영화당에서 추천 받아서 보게 됐다. 1편이 제일 좋다고 하니 2, 3편은 안보고 1편만 보기로 했다. 1편은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2,3편은 친구 집에 홈시어터를 새로 사서 기념으로 봤던 기억이 난다. 영화를 단순히 봤다는 사실에서 오는 감상과 다시 봤을 때 느끼는 그 깊이와 폭은 너무나 다르다. 확실히 고등학생 때 비해선 많은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었다. 고등학생 땐 그냥 액션 보고 개쩐다 이정도 생각했을 영화일 듯 싶다.
꿈인지 현실인지, 장자의 호접지몽
매트릭스는 꿈에서 깨어나는 과정에 대한 영화이다. 꿈 깨라는 말을 많이 한다. 실제로 매트릭스는 토마스 앤더슨이라는 프로그래머가 꿈에서 깨어나는 내용이다. 영화가 기가 막히다. 현실은 우리의 현실과 마찬가지로 시궁창이다. AI의 발달로 기계와의 전쟁이 일어나고 인간은 패배했다. 그리고 인간은 기계가 돌아가기 위한 전지와 열에너지로만 소모된다. 활동이나 관계와 같은 인간적 삶이란 없고 그저 캡슐 안에 갇혀있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간다고 믿게 만드는 프로그램된 공간인 매트릭스 안에서 존재하는 줄 믿으며 갇혀있다. 네오는 이 매트릭스 안에서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기 시작한 존재 중 하나다. 그는 모피어스라는 존재가 이 문제의식에 대한 해답을 줄거라 믿으며 그를 찾는다.
매트릭스는 믿음에 관한 영화이다
매트릭스를 보면 믿음의 힘에 대해서 나온다. 우리의 미래는 믿음의 크기와 그 생생함에 있다는 자기계발 서적스러운 내용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그것은 워낙 뻔하게 반복되는 레퍼토리라 우리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 레퍼토리를 새로운 방식으로 보여준다. 네오는 자신이 유일자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는 매트릭스에 갇힌 모피어스를 구하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그런 그의 행위는 그가 유일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며 주위 인물들의 믿음에 부흥하기 위한 행동을 하게 만든다. 뭐가 먼저인진 모른다. 믿음이 먼저인지, 믿음을 실현하려는 행동이 먼저인지. 그렇지만 그 둘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우리의 믿음은 현실을 통해 견고해지고 우리의 현실은 믿음을 통해 행동으로 이어진다. 믿기 시작한 네오는 유일자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죽음의 공포 뒤에 찾아온 각성의 순간은 그를 강하게 만들고 요원들에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게 된다.
매트릭스는 수많은 레퍼런스의 향연이다
이동진 작가가 말한 것처럼 매트릭스는 수많은 레퍼런스의 향연이다. 문화 덕후들에겐 이 같은 축제적 영화를 접했을 때 느끼는 쾌감 같은게 있다. 아름다운 순간들이었다. 읽어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약간의 뿌듯함과 이 모든 레퍼런스들을 잘 버무린 작가에 대한 경외가 뒤섞여있다. 우선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은 캐스팅 되기도 전 시나리오를 읽기 전에 읽어보라고 한 책 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하얀 토끼가 나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라는 한국의 공포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시고), 시온의 땅, 유일자의 재림 등에 대한 온갖 신화적 모티프와 레퍼런스가 섞여 있다. 장자의 호접지몽도 큰 흐름을 차지하고, 이 세계는 인셉션의 꿈속의 꿈 구조로도 연결되는 듯 하다. 트리니티가 네오에게 키스할 때 살아나는 장면은 <백설공주> 모티프도 활용된 걸로도 해석될 수 있다. 난쟁이들은 어디 갔을까? 레퍼런스의 향연을 지켜보면 뿌듯하다. 더 깊이 있는 글은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가 적은 글 (https://goo.gl/3KydhD) 에서 볼 수 있다.
매트릭스는 자기계발 영화이다
매트릭스는 의외로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보고 싶은 것만 봤을지 모르지만 믿음의 힘에 대한 부분은 내 현실 인식을 넘어설 믿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했다. 생각하는대로 살아야 한다는 믿음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매트릭스에서의 꿈과 현실을 현실에선 반대이다. 매트릭스가 현실이고 현실은 꿈이다. 잔혹하지만 인간으로서 현실에 존재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주어진 환경이며 프로그램된 환경인 매트릭스에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라고 나는 봤다. 회사는 매트릭스이고, 나로서 존재하면서 생존할 수 있는 현실은 바깥이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은 현실에서만 할 수 있지만 매트릭스가 주는 평온함과 안정은 기대할 수 없다. 그가 믿기 시작했다(He's beginning to believe)라는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믿기 시작하면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용기의 원천이 된다. 주어진 환경인 매트릭스를 깨보려는 시도의 씨앗이 나에게 한발자국 다가왔다.
매트릭스 마무리
매트릭스는 대단한 영화이다. SF 액션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그리고 철학적 액션 영화의 포문을 열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도 여기에 많은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다크나이트>는 위대한 철학적 히어로 영화이다. 그런 깊이를 좀 담아낼 수 있는 히어로 무비가 계속 나왔으면 한다. 매트릭스가 이렇게까지 대단한 영화인지 나는 몰랐다. 고등학생 때 보고, 인터넷 게시물로 엄청난 영화라는 찬사만 봤고 다시 볼 엄두가 안났는데 다행히도 다시 보게 됐다. 갈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 가야 할 길을 알아도, 봐야 할 영화를 알아도 걷지 않거나 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반성문을 적는 심정으로 영화 감상을 적었다. 시간이 지나고 돌아볼 때, 매트릭스로 구성된 현실 세계를 인식하고 벗어나게 해준 하나의 탈출구가 되어준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