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낳기 전 삶이 전생같이 여겨진다는 선배들의 말이 사실이었습니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줄은 미처 몰랐네요. 운동도, 취미 생활도 30분 남짓도 채 하기 힘든 전쟁 속의 육아에 익숙해지다 보니 내가 좋아하던 것들은 놓은 지 오래죠.
지난 점심시간 직장 동료가 지나가는 얘기로 F1을 무려 4번이나 봤다고 하더군요. 일반 극장에서 한 번, Dolby 극장에서 두 번, X 스크린까지. 얼마나 재밌으면 4번이나 봤을까? 스크린에서 상영이 내려가기 전에 꼭 보고싶다는 마음이 가득해졌습니다. 하지만 나는 주말에 아기를 봐야하고, 영화를 보려면 남편과 교대로 보는 방법 밖에 없더군요. 그렇게 까지 봐야하나를 고민하다 잊어 버렸고, 마침 주말 친정식구가 오는 찬스를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일요일 아침 조조를 예약하고, 때마침 소비 활성화를 위한 정부발 할인 쿠폰 6,000원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마치 어린이 시절 소풍가는 마음인듯 들뜬 마음을 안고, 전자레인지 팝콘과 탄산음료 화룡점정 스타벅스 커피까지 테이크아웃해서 영화관으로 향했습니다.
조수석에 타는 것이 얼마만인지? 남편과 나, 둘만 차에 탔다는 사실이 어색했습니다. 뒤를 돌아보면 베이비 시트에 아기가 있을 것만 같은 느낌. 하지만 3개월차 출근에 단련된 것인지 아기의 부재에 그리 마음이 무겁진 않았습니다. 든든한 친정 엄마가 봐주고 계시니, 눈 앞에 놓인 나의 자유를 만끽하자는 생각만이 가득했죠.
아아. F1 영화는 정말 재밌었습니다. 전율 넘치는 드라이빙 장면들, 귓가를 사정없이 리는 Dolby Atmos 의 360도 사운드까지. 마치 내가 드라이버가 된 듯한 착각과, 그들의 희노애락을 함께하는 기쁨이란. 돈말고 뭣이 중한디? 라는 중요한 메세징까지. 주인공의 삶이 마치 나의 삶인듯 완벽히 동화되어 현실은 잊고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영화가 끝나고서도 여운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저는 늘 과몰입해서 보는 경향이 있거든요. 영화를 봤다면, 반드시 같이 본 사람과 토론하며 그 여운을 끝까지 즐겨줘야 하거든요. 하지만 무미건조한 남편은 ‘재밌네’ 라는 한 마디 외에는 아무런 피드백이 없었습니다. (늘 그렇듯)
뭐랄까요. 물이 끓어오르기위해 99도 까지 내 자신을 열심히 끓이다 갑자기 찬 물을 확 끼얹는 기분이랄까요. 동시에 제 기분도 나락으로 가버렸죠. 그래도 이 소중한 3시간을 의미있게 지속하기 위해 ‘어느 장면이 기억에 남는지, 감동 받았는지’ 질문을 던졌는데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 라는 기가 막힌 답변만이 차 안을 맴돌뿐.
남편이 다음으로 꺼낸 말은 아기가 곧 낮잠 잘 시간이니 원격 앱으로 에어컨을 켜라고 부탁하는 말과 아기 밥은 뭘 먹여야 하나 였습니다. (Seriously?) F1의 감동은 이미 짜게 식었고 큰 맘 먹고 영화를 보러 나온 내가 우습게 보이더군요.
우리 집은 늘 비슷한 레파토리입니다. 저는 비교적 감정의 파동이 큰 편이고, 남편은 파동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나의 기쁨에 그는 공감하지 못하고, 슬픔도 마찬가지죠. 좁힐 수 없는 이 간극을 알면서도 따라오는 서운함은 어쩔 수 없는걸요. 말로도 설명이 안되고, 태어나길 이러니 어쩌겠습니까.
그를 만난지 9년차에 접어든 나로써, 그 날 이후로 이 서운함을 차에 내리고 나선 표출하지 않았지만, 제게는 또 하나의 옹졸함으로 남았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소재로 탄생했으니 고맙게 생각해야하나? 내 F1 감동 돌려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