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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별 Oct 09. 2020

나 휴가라고요! 휴가!

휴가를 방해하는 사람들

"김 팀장, 어디야? 이것 좀 회신해줘"
"팀장님, 삼실이세요? 휴가신가요? 자료 검토 좀 부탁드려요"
"팀장님, 휴가 중 죄송한데요. 진짜 급하다고 OO에서 연락 왔어요."
나 오늘 휴가인 거 맞아?
분명 휴가 공지도 했는데 왜 자꾸 찾는 걸까.


사실 신입 때는 연락 오는 게 신이 났다. '나  밥값하고 있었구나, 나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구나.' 하며 뿌듯했다.

대리 때는 나를 커버해 주는 상사가 있었다. 과장이 되고 차장이 되고 팀장까지 달고나니 그 직책에 따른 책임과 무게감으로 휴가 중에는 항상 업무와 관련된 통화를 하거나 이메일을 열어보거나 결국 노트북을 펼치고 일을 하고 있었다.



2020.9.25-

#1.

병원 진료가 있어 하루 휴가를 내었다. 오전 10시까지라 느지막하게 침대에서 뒹굴다가 병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지하철을 타려는 순간 거래처에서 연락이 왔다.

"팀장님, 오늘 배당금 입금 날인데 통장에 문제가 생겼는지 입금이 안되네요."

"아~ 그래요? 넵! 바로 확인하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병원에 곧 도착해서 간호사의 안내를 받고 채혈실로 갔다. 백팩을 의자에 내려놓고, 회사와 수탁계약을 체결한 은행 담당자와 통화를 하면서 사무실에 있는 후배에게 카톡을 날렸다.

그리고 곧바로 채혈 순서가 되어 자리를 옮기고 간호사한테 팔을 건넸다.

"손을 쥐었다 폈다 하세요. 따끔할 거예요. 자 손에 힘 빼세요... 저기 이제 힘 빼세요. 힘 빼셔도 돼요"

나는 전화와 업무지시 카톡에 정신이 팔려 계속 힘을 주고 있었나 보다.

"네 다 끝났습니다."

나는 채혈한 부분에 솜으로 누르고 일어서서 나가려는데 간호사가 나를 불렀다.

"저기 가방 가져가셔야죠!"


배당금은 다행히 잘 입금되었다.

첫 번째 Clear!


#2.

투자자 분께서 새벽 1시 넘어 메일을 보내주셨고, 당일 오후 4시까지 회신을 달라는 요청을 했다. 다행히 직원 중에도 동일한 메일을 받은 사람이 있어 내용 작성을 했다고 했다. 그렇게 안심하고 있었는데, 질의 준 것 중 한 항목을 잘 모르겠다며 확인 및 검토를 해달라고 메일과 톡을 남겼다.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중이었는데 버스 안에서 보내준 엑셀 파일과 drop box에 저장해 놓은 data 파일을 보면서 자료를 정리 한 뒤, 회신 톡을 남겼다. 

'아~ 끝났구나'하는 순간 나는 밖을 보며 깨달았다. 두 정거장을 지나쳤음을.

어쨌든 두 번째 clear!


#3.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상사로부터 문자가 왔다. '사무실인가요? 오늘 휴가셨던가요?'라며 자료가 꼭 필요해서 보내달란다. 나는 기존에 동일한 사례로 작성해 두었던 자료가 떠올라 메일을 뒤적거렸다. 그렇게 10여 분간 자료를 찾다가 발견된 파일을 참고하라고 메일을 보냈다. 그런데 본인도 있는 자료란다. 나는 10분간 더 뒤적거리다 또 다른 자료를 견하고 다시 메일을 보냈다.

그런데 거기에 돌아온 답변은 '법무법인에도 자료 요청해서 괜찮을 것 같아요. 고마워요'

'아... 그럴 거면 연락하지 말지.'

찜찜한 세 번째 Clear!


#4.

개인적인 일을 마무리하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맛나게 먹고 나오는데 대표님한테 전화가 왔다.

"아~ 오늘 쉬는 날인데 미안해요. 재무제표에 *** 부분이 어떻게 나오게 된 거죠?"

"네, 제가 확인하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리고 자료 확인이 어려워 회계법인에 연락해서 확인을 했다. 그리고 대표님께 회신을 드렸다.

대표님은 '휴가 잘 쉬라며 문자를 보내주셨다.'

네 번째 Clear!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노트북 없이 모두 처리 가능한 일들이었다.


정보기술의 발전은 분명 편리함을 선사했지만 그만큼 'ASAP'으로 응대해야만 하는 부담도 함께 주었다.

이메일과 전화, 문자는 분명 너무 편리하다. 일을 시키거나 바로 처리해야 하는 사람에겐 매우 만족도가 높은 시스템이다. 하지만 일을 해야 하는 사람 입장에게선 메일 한 통이, 전화 한 통이, 카톡 하나가 부담스러운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잠깐. 그러고 보니 나도 내 부하직원, 상사가 휴가 갔을 때 했던  장면이 문득 떠오른다.

"오늘 휴가신데 죄송해요. 저 이거 진짜 정말 ASAP 건인데 회신 가능할까요?"


나도 누군가의 휴가를 방해하는 직. 장. 인.이었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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