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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재현 Aug 17. 2021

연극에서 중요한 것은 그 길이가 아닌 탁월함이다.

인생은 연극이라는 클리셰

인생은 연극이다.

“이 세상은 하나의 무대요, 사람들은 한갓 배우에 불과하지요.
저마다 등장하고 퇴장하면서 평생 여러 가지 역할을 연기하는 거예요.”  
- 윌리엄 셰익스피어, 『뜻대로 하세요』중 -


나는 지방에서 태어나고 19살까지 자라서 문화시설에 대한 접근성이 다소 부족하게 성장했다. 고등학생 시절 인서울 대학에 대한 로망이 한 가지 있었다면 바로 자유로운 대학로에서 연극을 마음껏 보는 것이었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면서 대학생이 만끽할 수 있는 그러한 자유로움을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대박사건인가 육군사관학교는 매주 수요일 오후에 문화체육활동을 실시하는데 동아리 부서에 연극부도 있었다. 학창 시절의 동경을 따라 자연스럽게 연극이 좋아서 그것을 쫓아 4학년 생도 시절에는 연극부 부장을 맡았다. 졸업을 앞두고 열린 학교 축제 화랑제에서는 주연으로 전 교생 앞에서 연기를 뽐내기도 했었다.


당시 우리 연극부가 준비한 공연 ‘쉬어 매드니스’는 관객에, 관객을 위한, 관객에 의한 코믹 추리극이었다. 간략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완전 미친놈 미용실 ‘쉬어 매드니스’에 의문의 살인사건이 발생하여 이때 미용실에 있던 4명의 사람들이 유력한 살인 용의자로 지목되고 범인을 찾기 위해 용의자를 취조하는 형사들과 관객들의 열띤 공동수사의 결과로 공연의 막바지에 1명을 범인으로 지목한다. 관객의 선택에 따라서 연극의 결말이 결정되는 참여형 연극이다 보니 다양한 경우의 수를 고려하여 많은 분량의 대사를 외웠어야 했다. 그리고 내가 맡았던 미용실의 주인 토니는 당시에 다소 낯설었던 성소수자를 그린 역할이라 연기에 더 열정을 쏟아야 했다. 무대를 준비하는 동안에 마치 내가 전문 연기자가 된 것 마냥 너무 들뜨고 기분이 좋았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주말 외박 간에는 혼자서도 자주 혜화 대학로를 찾아 연극을 관람했고 또 동아리 부장까지 역임했으니까 당시 나의 연극에 대한 사랑은 과히 대단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나는 인생은 연극이라는 비유가 참 좋다.

연극부 동료들과 함께한 공연 '쉬어매드니스'

셰익스피어는 그의 희극 『뜻대로 하세요』에서 한 광대의 입을 빌려 세상을 무대에, 인생을 연극에 비유하였다. ‘인생은 연극’이라는 이 말이 단지 위대한 극작가이자 시인이었던 셰익스피어가 남긴 말이기 때문에 수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살아남아 언급되는 것일까? 유명인의 말이라는 후광효과를 뛰어넘는 그 무엇의 의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인생은 연극이란 명제는 문학적 비유인 동시에 사실에 기반한 현상을 기술한 것은 아닐까. 인류 공동체 혹은 인간사회라는 것은 하나의 거대한 연극무대와 같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는 기본예절에서부터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과 규칙들 속에 살아간다. 도덕, 종교, 정치 등 모든 사회적 행위 속에 삶을 영위하는 우리의 모습은 마치 연극에서 정해진 행동 범위 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배우들과 다르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한 개인의 사회적 삶 전체는 사회라는 무대 위에서 벌이는 연극이며, 모두는 배우라고 하는 말은 설득력을 가진다. 물론 연극에 임하는 배우들은 사전에 기승전결을 포함하고 있는 대본을 받아보고 연습할 시간이 주어진다. 반면에 진짜 인생에서는 대본을 사전에 읽어볼 수 없다. 또 다른 주요한 차이는인공성의 인식 여부를 뽑을 수 있다. 아무리 잘 짜인 연극 무대라도 관객은 그것이 허구임을 전제로 극을 관람한다. 반면 우리의 삶은 사회적 의례와 규칙들의 체계가 탄생한 순간부터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 인생 전반에 스며들어있기 때문에 그것이 가진 인공성을 거의 깨닫지 못할 뿐이다. 마치 짐 캐리 주연의 영화 『트루먼쇼(1998)』의 주인공 트루먼 버뱅크가 평생을 TV 무대의 주연배우로 살아가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저마다 등장하고 퇴장하면서 평생 여러 가지 역할을 연기하고 있다. 우리의 인생이 정말로 연극과 같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세상을 무대로 보고 인간을 연기자에 비유할 때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이며, 당신은 어떤 연기를 하고 싶은가?


연극에서 배우는 주어진 대본에 따라 연기를 해야 한다. 물론 즉흥적인 대사나 애드리브를 잘하거나 혹은 유명세를 가졌다면 표현의 자유가 조금 더 있을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배우는 대본에 따를 수밖에 없다. 비슷하게 사회라는 무대의 등장인물인 우리 역시 어쩌면 누군가 이미 정해 놓은 대본 따라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혹자는 “우리는 연극배우가 아니기 때문에 나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고 (자유의지) 그에 따른 책임을 지며 살아가지 않는가?”라며 반문할 수 있다. 그렇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으며 우리는 스스로 원하는 삶을 원하는 방식에 따라서 살아갈 수 있다. 더욱이 오늘의 대한민국에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무신론적인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 많다. 2012년 갤럽 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무신론자 비율은 15%이며, 이는 중국(47%), 일본(31%), 체코(30%), 프랑스 (29%)에 이어 세계 5위라고 한다. [1]


초월적인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자유의지는 더 큰 의미를 지닐 것이다. 여기서 잠시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한 가지 흥미로운 사례를 소개한다. 2007년 독일의 베른슈타인신경센터에서 존 딜런 헤인스 박사는 인간의 뇌를 연구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실험을 실시하였다. 헤인스 박사는 실험에 참여한 사람은 의자에 앉아 있다가 자신이 원할 때에 앞에 놓인 왼쪽과 오른쪽 버튼 중 하나를 누르게 했다. 그의 실험에 따르면 피험자가 자기 판단을 의식하기 몇 초 전에 연구팀은 뇌영상으로  피험자의 판단이 예측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유의지의 존재 유무에 대한 물음[2]

피험자가 의식하기 전에 뇌는 이미 행동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 나아가 최근의 뇌과학의 일부 연구들은 의식이 육체의 행동을 만드는 신경세포들의 전기적 상호작용에 의한 부산물일지도 모른다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 유무에 대한 논쟁은 뇌 과학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사유로 이어지는 방대한 논쟁점 지니고 있기에 이 장에서 다 소개할 수 없다. 다만 여기서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진정으로 우리는 매 순간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이다. (여기서 일부 뇌과학자들의 주장과 같이 인간의 자유의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정말 나는 그렇게 될 줄 알았을까?

나의 주장에 설득력을 높이기 위하여 개인적인 경험을 예시로 제시한다. 나는 5년째 일기를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작성하고 있다. 기록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는 순간에는 그 과정을 세세하게 적어두는 편이다. 또한 여느 다른 사람들처럼 일정 시간이 지나면 과거의 기억을 잊어버리고는 한다. 당장 지난주 월요일에 먹은 점심식사도 바로 기억하기 힘든데 어떻게 몇 년 전의 일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살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나 역시 스스로의 인생을 책임지는 성인이자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중요한 결정의 순간들을 마주하곤 한다. 후에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선택의 결과는 긍정적이든지 부정적이든지 나타나기 마련이다. 선택의 결과와 마주한 바로 그 순간의 나의 생각과 반응이 퍽 재미있다.


그 결정의 순간의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내가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을까? 왜 4학년 2학기 졸업을 앞두고 병과를 보병을 선택했지? 또는 내가 왜 그때 군 위탁교육 지원 시에 그 과정에 (ex. 코드명 XXX) 지원했을까? 희망하는 부대와 보직을 제출하라는데 그때 왜 거길 지원했을까? 등과 같다. 그리고 결과를 마주한 순간에 보통의 경우 나만의 방식대로 해석한다. 만약 결과 나쁘다면 처음에는 낙담하고 힘들어하겠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태로를 바꾼다. “아 씨 바보같이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하면서도 결국에는 “이 길도 다 내가 가야 하는 운명이다.”로 귀결된다. 그 반대의 경우에는 “나의 선택은 탁월했어.” “역시 이 길은 내가 가야 한 길이야.”라며 이미 두 가지 경우에 대한 상황을 다 머릿속에 그려놓고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내가 그럴 줄 알았어.”라며 여긴다. 이것은 원래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신념을 확인하려는 경향성, 즉 확증편향을 (Confirmation bias) 잘 나타내는 사례다. ‘온전히’ 스스로 내린 선택과 결정이기에 (자유의지) 결과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어쨌든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는다. 설령 그것이 부정적일지라도 “적어도 나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니까…”라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런데 일기를 꾸준히 5년 이상 기록하다 보면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결정의 순간들에 나의 의사결정들은 완전히 자유로웠던 것이 아니며 나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별로 없었다. 예를 들어서 내가 만약에 전 세계에 있는 모든 대학교에 다 입학할 실력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 집안의 경제사정이 이를 뒷받침할 수 있을 만큼 풍족했다면 나는 과연 육군사관학교를 입학했을까? 아니 애초에 집안에 돈이 엄청 많이 있다면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고생해서 공부를 하긴 했을까? 근무지를 선택할 때도 전 육군에 있는 모든 곳을 고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육군의 경우 먼저 크게 권역이 (동부, 서부 등) 결정되고 후에 군단, 사단, 여단 규모까지 결정이 된 이후에 나에게 그중에서 몇 가지 부대가 있는데 어디를 갈 것인가 인사담당자가 묻는다. 그러면 나는 또 해당 부대의 위치와 근무여건 등을 고려해서 나에게 맞는 곳을 ‘선택’한다. (물론 어느 부대든 당신이 근무하는 곳은 다 좋은 부대다!) 그리고 그 선택마저 100% 반영되는 것이 아닌 일부 희망근무지를 제출하는 참고 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나는 군 위탁교육에 선발되어 석사학위 1학년 과정 중에 있다. 위탁교육 선발 공고문을 확인하고 결과를 확인한 것이 딱 1년 전 이 시기이다. 사실 나는 지난 30년을 충실한 문과인으로서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은 대학원에서 운영분석을 (경영과학) 수학하고 있다. 이렇게 중요한 인생의 결정에 관한 것이지만 솔직히 내가 왜 이 과정 코드명을 지원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수학이 싫어서 고등학생 때 문과를 택했는데, 이렇게 돌고 돌아서 이공계 학생이 될 줄이야. 이것이야 말로 인생의 운명이 아닐까 생각하려는 찰나에 작년 지원 당시에 작성한 일기장을 살펴봤다. 역시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원래는 경영학을 지원하려고 관련 자격증도 (매경테스트, TESAT 등) 준비하고 있었는데 문과 관련된 학과 선발인원이 축소되고 이과 분야가 증가하는 바람에 그나마 가장 관련 있는 경영과학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면접을 준비했던 것이다. 물론 경영학과 경영과학은 전혀 다른 학문이었으며, 나는 미분적분의 기초부터 다시 학업을 시작했어야 했다. 아니 잠깐만 어쩌면 정말로 이건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배우가 되어, 어떤 연기를 펼칠 것인가?

나의 온전한 자유의지에 의해서 판단하고 결정했다고 믿었던 것들이 어쩌면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음을 깨닫는다. 나는 어쩌면 연극의 배우가 대본은 정해져 있지만 그것을 소화하는 호흡의 간격과 톤의 높낮이를 조정할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조금 더 양보해서 즉흥 연기를 (애드리브) 할 수만큼의 능력을 갖추었다고 해도 결국에는 정해진 대본을 따라서 극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그런 배우가 아닐까. 내가 생도 시절 준비했던 연극 ‘쉬어매드니스’가 아무리 관객 참여형 연극이고 상황에 따라 범인이 결정이 되었어도 결국에는 4명 중 한 명이 지목되게 되어있고 연극은 정해진 흐름을 따라야만 했던 것도 비슷한 이치다. 이제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을 언급하고 싶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될 수 있을까, 아니 도달해야 할까?


1. 이미 결과가 정해진 이야기는 재미없기 마련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일정 수준 이상에 도달할 수 없는 그런 세상이라면 열심히 살아야 될 이유가 하나도 없지 않은가. 에이 모르겠다 인생 그 가이 꺼 그냥 대충 살다가 가자. 결정론에 순응하는 삶

2. 그렇다면 연기의 풍부함에 주목하겠다. 같은 내용이지만 누가 말하는가 스피커에 따라서 충분히 다양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마치 모든 뮤지컬에는 주인공이 존재하고 시간대에 따라서 같은 배역을 연기하는 다른 배우가 존재하며, 어떤 배우가 출연하는가에 따라 (인지도와 연기력 등) 개런티 값은 천지차이인 것처럼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

분명 인생에는 노력과 의지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이러한 삶의 속성을 신의 섭리라고 여기든지 자연적인 현상으로 보든지, 인간은 그런 구조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 마찬가지로 인생이란 무대에서 각자의 삶이라는 주제로 단 한 번만 상영되는 공연을 펼치는 우리들도 등장에서 퇴장까지 우리의 의지와 능력으로만은 해결할 수 상황들을 경험할 것이다. 비록 짧은 군 생활밖에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지난 기억을 상기해보면 군 복무 간 내가 온전히 나의 자유의지를 통해 결정하고 행할 수 있었던 일은 결코 많지 않았다. 각종 선발과정이나 경쟁, 콘테스트에서 원하던 결과를 얻은 경험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순간도 많았다. 앞으로 내가 마주할 미래의 군대에도 역시 또 다른 예상하지 못한 극본이 나를 기다릴 것이다.


배우들에게 정해진 극본이 있긴 하지만 연기하는 장본인은 배우 자신이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새로운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배우는 주어진 극본에 따라 연기하지만, 어떤 제스처와 표정과 음성으로 연기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배우의 몫이다. 훌륭한 배우는 극본에 따른 연기를 하지만 동시에 자신만의 자질과 개성을 발휘하여 개성적인 연기를 한다. 훌륭한 극본을 가지고 실패하는 배우가 있고, 미흡한 극본을 가지고도 멋진 연기를 하는 배우가 있다. 주어진 환경이나 조건에 어떻게 대응하고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은 연기자인 우리의 몫이다. 고향에서 초중고등학교를 같이 수학한 친구가 있다고 치자. 그들은 20여 년 동안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왔지만 개인의 자질과 노력 여부에 따라서 성인이 된 후 모두 다른 개성을 지닌 배우로 성장한다. 물론 태어난 환경의 중요성을 결코 간과하거나 부정할 수 없다. 금수저로 태어났다면 본인을 포함한 그 자식 세대까지 금수저의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환경이 100% 모든 것을 결정짓는 것 역시 아니다. 만약 극본이 미흡하면 연출가에 좋은 극본을 찾아다니고, 연기력이 부족하다 싶으면 연기력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다면 분명 그는 훌륭한 배우가 되어있을 것이다.  


훌륭한 배우는 현재의 연기에 최선을 다한다. 배우들은 주어진 극본을 통해 멋진 연기를 하려고 노력하지만 뜻하지 않게 실패를 맛보기도 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다시 연기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인생은 연극과 달리 재공연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지나간 연기는 만족스럽든 불만족스럽든 이미 지난 것이므로 이에 연연하지 말고 현재의 막과 장에 충실한 연기를 해야 한다. 영광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막과 장에 충실한 배우가 되어야 한다. 4년간의 생도 기간의 수련의 막을 앞두고 좋아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연극 공연은 내 인생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경험이다. 아마 나의 남은 인생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면서 멋진 의상과 분장하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있는 특별한 순간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미용실 주인 ‘토니’가 되어 이처럼 행복한 연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무대 뒤에서 묵묵히 노력한 동료들이 (연출, 스텝들)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 우리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 순간에 각자의 방식으로 연극을 즐겼다. 훌륭한 연기자는 어떤 극본이 주어지든, 자신이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며 연기 자체를 즐기는 연기자이다.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내가 현재 맡고 있는 역할은 어느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나만의 소중한 역할이다. 앞으로도 군(軍)이라는 무대에서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슴 벅차게 행복한 배우가 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인생은 연극과 같다. 중요한 것은 그 길이가 아니라 연기의 탁월함이다.”
- 루키우스 세네카 (로마의 철학자) -



[1] 출처: 중앙일보 [월간중앙 2월호] 대한민국은 종교의 천국? 아니, 무신론 강국!

[2] 출처 : 한계례 뇌 과학’이 묻는다 “나의 자유의지는 ‘나의 것’인가?”(2013.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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